고려를 세운 왕건
1. 왕건의 탄생 배경
고려를 세운 왕건은 처음에는 궁예로부터 나라를 접수하여 국명을 고려라 하고, 중국 오대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었다.
후백제와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신라의 경순왕에게 항복을 받아내어 병합을 한 후에 아들에게 배신당한 견훤을 품어서 결국 후삼국을 통일을 하였다.
왕건은 세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아울려야 하였으며, 지방 호족들을 하나로 묶어줄 정당성과 백성들을 통치하여야 할 강력한 힘이 필요로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서사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과 용의 딸이 결혼했다는 작제건 설화를 만들어냈다.
이 설화는 왕건의 조상을 신라의 성골이라 하면서 신라를 품었으며, 더욱이 당나라 천자인 숙종을 등장시켜 중화 질서 안에서의 권위를 확보하여 혈통의 고귀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해 해상 세력을 상징하는 용왕과의 결합을 통해 예성강 유역의 호족 집단의 대표성을 확보했으며, 왕건이 나서 자란 지역인 송악산 자락의 신성함을 만들기 위하여 당시의 사상이었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도 삽입시켰다.
즉, 왕건은 황해도 촌놈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방계이었으며, 당나라 천자의 피도 섞였으며 신성한 서해 용왕님의 후손이라는 것으로 만들었다.
2. 왕건의 정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연유는 각 지역의 호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 군사적 지지를 얻었던 것은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 정치를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정치를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이 있었다.
왕건은 결혼을 통해 호족들과의 연합을 굳건히 하면서 그들에게 사심관이란 직책을 하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을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호족의 세력은 고려 초기, 국가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으며, 호족들의 자제들은 개경에 거주하게 하여 감시와 통제를 하였으며, 호족들의 충성 아래서 자신의 정치와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였다.
왕건은 다양한 방식으로 호족들의 충성의 대가로 세력이 큰 호족에게는 녹읍인 세금을 수취할 권리와 식읍인 세력 연고지에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만들어 주는 경제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사적인 군사력까지 보장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자신이 죽게 되면, 호족들이 고려에 충성을 할지는 불안하였으며, 왕무 태자가 자신의 대를 이어갈지가 불안한 것은, 정략적 사랑으로 지나친 평화를 강구했던 왕건은 걱정이 많아지게 되었다.
3. 왕건의 통합 의지
왕건은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정략적 조치로 흑창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수확의 10분의 1 정도 세금을 거두었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풀어주거나 전란 시에 급증한 이민들을 정착시켰다.
백성들을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이용하기 위하여 절을 새로 짓고,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국가차원의 종교행사를 성대하게 행사를 하면서 불교를 수호하는 왕실이라는 선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더욱이 신라의 경주의 소수의 진골 귀족들이 고위 관리를 독차지하는 골품제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골품제를 망국의 근원으로 보았으며, 천민과 노비가 아니며 누구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정책은 전체적으로 어질고 후덕하게 백성을 품으려 했던 성군의 자세로 평가받았으며, 수차례의 민란과 지역의 봉기는 있었지만 성공할 수가 없었다.
결국, 왕건은 통합을 위해 호족들에게는 사랑과 재화를, 일반 백성들에게는 신화를 통한 프로파간다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