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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갑신정변에 관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관하여

1. 개념

 

갑신정변은 1884년 조선의 개화당이 청국의 귀속하는 정책에 저항하여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2. 과정

 

1874년부터 김옥균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개방 후, 자국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 자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2년 7월 임오군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민비 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수구파는 청국의 지원 요청을 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귀속 화를 결정하였다.

청국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비정권을 세워 놓고도 청군을 철수하지 않고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 귀속 화를 위한 간섭 정책을 자행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침해하였다.

청군은 민비정권을 압력 하여 청국의 특권을 허용한 조중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하고, 그 전문에 조성을 청국의 속국이라고 하고, 조선왕조 정부에 대해 외교에 관한 일은 일체 청국에 문의하도록 하였다.

청국과 청군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을 저지시키며,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고 개화당을 정계에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은 청국의 조선자주독립의 침해와 개화당들의 자주 근대화 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비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원인이 있었다.

김옥균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 대개혁을 단행을 하였다.

갑신정변이 있기까지, 박영호는 신식군대를 양성하였으며, 윤웅렬도 500명의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서재필은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켜 갑신정변의 중요 지휘를 하도록 하였다.

김옥균은 정변 준비를 위해 비밀무력 조직으로 충의계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신복 모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1884년 8월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함대를 격파하여 청군은 계속 패배를 하자, 김옥균은 1884년 9월 정변을 단행을 결정을 하였다.

삼일천하의 주인공들

3. 신정부 수립

 

1884년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관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등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을 하였다.

개화당은 민비수구파 거물인 민태호, 민영목 등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고 개화당의 배신자 환관 유재현도 처단을 하였다.

개화당은 신정부를 수립하면서, 신정부의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하였다.

 

4. 개화당의 혁신정강

 

혁신 정강은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공포되고, 국왕 고종이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공포하고 정강 실시를 선언하였다.

현재 김옥균의 갑신 일록에 수록된 14개 조항은 조공하는 허례 폐지,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제정, 지조 법 개혁, 내시부 폐지, 탐관오리 처벌, 환상 제도 폐지, 규장각 폐지, 순사 제도 실시, 혜상공국 폐지, 유배와 금고 된 사람 조사 석방, 근위대 설치, 국가재정 호조 관할, 재무 관청 폐지, 의정소 정사를 결정, 육조의 불필요한 관청 폐지하여 당시 개화당의 신정부의 개혁정치의 의지와 기본 내용을 집약한 것이었다.

 

5. 갑신정변의 실패와 원인

 

국왕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정치 실시의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청군이 1,500명 병력이 창덕궁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공격을 하였다.

일본군은 미리 철병을 준비를 하였으며,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서 청군을 대항할 수 없어 패함으로써, 개화당의 정권은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이에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피살되었다.

실패의 원인은 청군의 불법적인 침입과 군사적 공격, 일본군의 배신적 철병, 개화 정책의 실패, 민중의 지지 결여, 개화당의 민비와 청군의 감시 소홀과 정변 수행 기술의 미숙 등이다.

 

6.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근대 한국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세계사적으로 한국민족이 대개혁을 단행하기에 적절한 시기로서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한국 근대사에 개화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였으며,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의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문화 및 자주적 근대 국방을 위하고 개화 운동과 민족운동이었다.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을 추구하는 본질이었다.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