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1. 생애
마틴 루서 킹, 1929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침례교회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감리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1954년 앨리배아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시작으로 남부 기독교 지도자협의회를 구성했다.
무저항 비폭력주의로서 흑인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66년 시카고를 중심으로 차별과 빈곤 타파 활동을 하던 중, 1968년 테네시주 멤피스시에서 암살됐다.
1986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탄생 기념일이 1월 셋째 주 월요일이 국경일로 지정됐다.
2. 흑인 민권운동
말틴루서 킹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민권운동가였으며,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연설했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 그는 정치 철학과 종교 철학이 진화하는 과정을 따라갔으나, 그 후, 그는 흑인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대중들이 의식할 수 있게 제시했다.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그의 인생관과 말, 글에서 영감을 얻을 정도로 그는 만의 은유법과 능숙한 웅변술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의 아버지 킹 시니어 목사로부터 백인과의 인종차별과 분리 정책에 대한 법률로 제정된 체제에 협력을 거부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간디의 희망을 바탕으로 한 비폭력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보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목사가 되었다.
1955년 몽고메리 흑인 주민이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요구하자, 그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조직에 도움을 주었으며, 버스회사에 대한 시민 불복종 프로그램을 운영하자고 했다.
그는 흑인도 시민모임을 강조하며, 흑인들 문제해결 하기 위한 소송에서 설득 있는 연설로서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으며, 몽고메리는 근대 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57년 그는 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를 조직하고 연좌시위와 행진, 보이콧. 자유의 수레 행진을 하였으며, 미국 흑인들의 선거인 등록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조직을 했다.
SCLC는 인종 문제이기 전에 백인 기독교 지도자들의 무능함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이러한 시위는 신문 머리기사에서 이 운동의 선봉에서 기사로 장식했다.
그는 미국은 독립선언 이후, 인종 문제에 있어서 정신 분열적인 특성을 드러냈다고 했으며, 분리 정책과 인종차별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에 존재하는 이상한 역설이다.”라고 했다.
SCLC는 헌법을 인종 분리법에 대항해 싸우는데 최대한 활용했으며, 애틀랜타 등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합법적인 공격수단이 되었다.
이 캠페인은 점차적으로 도발적이고 위험해졌고 감옥에 들어가는 전국 곳곳의 교회 방화와 폭행, 워싱턴 행진까지 인권의 문제가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비폭력 시위를 전도했으나, 폭탄과 비난, 체포와 투옥, 가족의 협박 등을 견디어야 했다.
1966년 그는 가족과 함께 시카고의 빈민가에 갔으나 흑인들이 “흑인 세”라는 맹목하에 같은 숙소에도 백인보다 세배로 더 많이 냈으며, 부동산 소유가 불가능했으며, 복지 의존성의 악순환을 폭로했다.
그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캠페인 벌리면서,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아니라 운리적으로 세계를 이끌고 정의와 평등, 민주주의를 추구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