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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행복한 사회는 가능한 것인가?

행복한 사회는 가능한 것인가?

 

행복한 사회 역사의 예언자 이사야는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몰고 다닌다. “라는.“ 말은 계급 없는 사회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는 구상이 아무리 많이 변했더라도 세상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전쟁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한 사회의 도래를 포고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인류가 더 이상 신의 손짓이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수천 년 동안 똑같은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걸어서 안 된다는 확신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은 행복한 사회의 구상을 매우 급진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복종하는 자들과는 반대로 사유재산이나 자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는 아직 존재한 적이 없지만, 농민과 군인, 철학자로 짜인 신분제도는 자연의 소산으로 보는 점에서 극도로 부수적이었다.

행복을 더 많이 기대할수록 현재와 행복한 사회와는 거리가 더 멀어질수록, 행복한 미래를 자세하게 그리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미래의 물감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물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을 신의 모습이 아닌 형태로 그리는 부정적인 신학과 함께, 낙원을 실제의 낙원과 다른 형태로 그리는 부정적인 유토피아가 존재하므로 초인과 계급 없는 사회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결국, 누가 이 세계의 비참한 상황을 끝내고 행복한 시대를 이끌 것인가? 의 물음에 플라톤은 지()와 덕()을 갖춘 지배자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행복한 사회에 대한 동경은 책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유토피아 정신의 분출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행복한 사회가 실현된 적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학파의 공동체가 있었고, 고대 팔레스타인에 에센 파의 공동체와 아시아와 유럽에 수도원 공동체가 있었다.

 

공동체가 신의 뜻을 따르면, “행복한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창조주는 아름다운 피조물과 추한 피조물, 부유한 피조물과 가난한 피조물, 진보한 피조물과 미개한 피조물로 두 종류의 피조물을 시 세상에 창조해 놓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식을 가진 모든 인간의 존재는 행복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개인의 명확하고 열정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가게 되면, 최대의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