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의 역사
1. 음악의 개념
음악이란, 소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시간 예술의 한 가지로서, 소리의 높낮이, 장단, 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한 예술로서 여타 예술과 구별되며, 음악은 시간 예술이라는 점에서 공간 예술과도 구분된다.
소리는 악음과 소음으로 구분되지만, 음악은 악음을 소재로 삼고 소음은 제외시키지만,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서양음악의 정의에 관한 요소는 선율(멜로디). 장단(리듬), 화성(하모니)으로 언급하지만, 세계적인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은 선율과 장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포괄적 개념이다.
2. 음악의 특색
한국음악의 특색은, 음악의 구성요소가 잘 나타나며, 음악의 3요소인 선율, 장단, 화성중에서 선율과 장단은 갖추었으나, 화성에 해당하는 요소가 빠진 것이 서양음악에 비해 특색이다.
한국음악은 오랜 세월에 중국과 교류하여 왔으므로 중국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음악에서 장단은 시간의 기본단위인 박자로 구성되어 일정한 속도를 의미하는 템포로 구성된 특색이 있다.
한극 음악에서 구조적 형태를 가리키는 악식을 한극 음악에서는 틀 또는 형식이라 하며, 이러한 음악의 특정 부분이 반복되는 도드리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성악곡이나 기악곡에서 흔히 발견되는 한 배에 따른 형식과 성악곡의 가사에 따른 확대형식, 연주 현태에 따른 메기고 받는 형식 등으로 나누는 특색이 있다.
3. 한국음악의 역사
1) 상고시대
상고시대는 마한, 진한, 변한이 병존하는 삼한시대로서, 농사의 풍작을 빌고 감사하는 굿을 벌이면서, 가무로서 춤을 반주로 금속 타악기를 사용하였다.
상고시대는 외국사신을 위한 연향이나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행렬이 없었기 때문에 음악 및 의장, 고취 등이 없는 것이 특색이었다.
2) 삼국시대
(1) 고구려시대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는 거문고이었으며, 이는 “삼국사기” 악지에 진날 라에서 보낸 중국의 칠현금을 개조하여 만든 현악기가 거문고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악기는 민속춤에서 반주음악으로 관현악로서 세련된 민속음악이었으며, 궁중에서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악은 비파 같은 서역 악기와 제고, 담고 등의 타악기가 있었다.
(2) 백제시대
백제의 음악은 궁꼬, 마꾸모, 횡적 등 편성으로 춤을 반주하였으며, 백제국의 풍속에 따른 반주음악의 관련 합주는 백제의 민속음악이었다.
배제 음악에서 사용된 악기는 중국에서 수용된 외래 악기이므로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음을 나타냈다.
(3) 신라시대
신라는 가야국 멸망 무렵 가야금을 받아 들어서, 신라의 유일한 악기로 신라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신라의 연향 악으로 쓰인 가야금의 용례는 가무, 하신 열무, 사내 무, 한기무, 상신 열무, 소경무, 미지 무이 었다.
3) 통일신라시대
(1) 당악
당악은 당나라의 음악인데, 당나라 헌종 이후에는 악지에 속악을 가리켰으며, 신라의 당악은 “삼국사기” 악지에 신라의 악기로 소개되는 향비파는 실제로 당비파로 암시했다.
신라시대에 당악이 존재하여 고려시대에 송나라 음악이 당악이었으며, “악학궤범”에도 북과 대고는 좌우의 당악과 향악 사이에 놓여 좌우의 음악에 겸용하였다.
(2) 향악
향악은 당악의 대칭어로서, 향당 또는 향토의 음악을 가리키며, 신라의 향악이 날 당악 수용 이후, 통일신라 후기의 향악을 말한다.
“삼국사기” 악지에 향악은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박, 대고 등 8종의 악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향악 편성은 가야금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음악에 비해 매우 확대되었다.
(3) 사회
사 뇌란, “시나위”의 옛말로서 중국 시 송의 대칭으로 향가와 동의어이며, 사뇌는 “아야”라는 차사를 가진 “차사사뇌”와 동요와 풍요와 같이 단순한 “차사 없는 사뇌” 두 가지로 구분된다.
(4) 금가
금 가란, 거문고 반주에 의한 노래 또는 거문고 독주를 뜻하며, 일종의 방중 악에 해당하며, 조정 교묘의 음악과는 다르다.
통일신라에서 귀족 출신으로서 가장 부목을 받는 음악가는 옥보고와 그가 만들어 후세에 전한 음악이었다.
“삼국사기” 악지에 옥보고는 신라의 음악기관인 음성 서로 가지 않고 지리산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혀 30여 곡의 거문 고곡을 지언 인물이고 했다.
(5) 범패
범패는, 불교의 의식음악으로서, 음악적으로 자유 리듬에 무반주 현태이며, 가사는 한문으로 된 5언 1구 넷으로 이루어진 것과 6억 또는 7언을 된 것 등이 있다.
범패는 진감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삼국유사”의 월면 사조에 보면, 범패의 존재가 이미 76d 년에 있었음을 암시했다.
(6) 무애와 거사 소리
신라에 범패승에 의한 불교음악 외에 민간 포교를 위한 불교음악으로서 무애와 거사 소리가 있었다.
무애란, 원-효가 우리말이 섞인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포교를 위해 촌락을 다니며 손에 들고 춤을 춘 호리병을 무애라 하며, 나중에 원효의 춤을 무애라고 했다.
차 득공이 불경 이야기를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며 동냥을 구했는데, 후세에 꽹과리를 손에 들고 “부모은중경”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며 동냥을 구한 소리 계통의 서사가 이었다.
4) 고려시대
(1) 아악
아악은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이다.
아악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예종 11년에 송나라의 휘종에게 주청 하여 실현되었다.
(2) 당악
고려시대의 당악은 당나라의 음악이 아니고 송나라 음악으로서, 11세 게 문종의 주청으로 송나라의 악공이 고려에 파견되어 교려 음악인들에게 송나라 음악을 가르쳤으며, 예종의 주청으로는 1114년 송나라의 연향 악인 “대성 신악”이 들어왔다.
(3) 고취 악
고취악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탄 수레의 앞과 뒤에서 의장과 함께 행진하며 고취가 연주하는 음악이다.
고취를 악부라고 칭하는 것처럼 고취 음악은 당악기로 구성된 교방악과 다르지 않고 연주인의 수는 100인을 정수로 했으며, 고취악은 행진곡이라기보다 여러 의장과 함께 성대한 위의 를 보이는 행렬 음악이었다.
(4) 향악
고려 전기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 삼국악, 양부 악의 전통에서 볼 수 있어, 거의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고려 향악의 악기는 신라의 향악과 같이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대고, 박의 편성이며, 이밖에 당악 연주에 장구가 곁들여져서, 장구를 제외한 고려 전기의 향악은 신라 향악과 같고 장구가 고려 연주되기 시작은 문종 때부터이다.
고려 후기의 향악은 명종에서 고려 말까지이며, 후기의 음악적인 특징은, 궁중의 의식음악이 위축되고 민간 음악이 확장되었다.
궁중 의식음악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38년 동안 조정이 수도를 떠나서 있고, 몇 차례 병란을 겪으며 악공의 이산 과음 악의 폐실 위기로 인하여 궁중 의식이 중단되었다.
5) 1900년대 이후 음악
(1) 서양음악의 수용
서양음악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시대 말 엽부터로서, 중국, 서역 등과 교류하는 동안 서양의 악기나 음악이 유입되었다.
서양음악의 수용은 1885년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하며 가르친 찬송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청나라와의 문화교류 및 실학자들인 홍대홍, 박지원 등의 왕래를 통하여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서양음악의 주체는 서양식 군악대 창설이며, 러시아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의 군악대 창설 주장과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서양식 군악대는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왕직 양악대가 개편되고, 1916년 박우용이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해산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서양 작곡 개념에 의한 창작품이 처음으로 선보였던 것은, 독일인 에케르트에 의한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1902년 황실로부터 대한제국 국가를 에케르트는 위촉받아서 한국의 전통적인 음계를 바탕으로 하고 서양음악의 현식과 화성을 사용한 “대한제국 애국가”를 탄생시켰으며, 이 음악은 제목 상으로 애국가이며, 실제로는 공식적인 국가였다.
그 후, 서양 선교사 및 평양 숭실학교에서 코르넷과 바이올린, 성악, 풍금 등을 수확한 김인식은 1905년 “학도가”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그 뒤 창작활동을 한 이상준은 새로운 음악 풍토에서 배출되었으며, 1909년 전통음악 전수와 서양음악의 수용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의 조양 구락부라는 단체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이는 전통음악과 서양 음악을 동시에 수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이었다.
그 후, 조선 정악 전·습소 출신의 음악가로서 활동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홍난파로서, 그는 1918년 동경 유학을 했으며, 3.1 운동 이루 귀구 하여 창작분야에 봉선화 등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다.
1925년 윤극영의 동요집 “반달”을 출간하여 우리나라 동요의 패턴을 정착시키는데 역할을 하였다.
1930년대 서양음악의 수용 및 발전기는 외국에서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음악가들이 음악회와 작품집을 출간하여 노래중심으로 양약 활동이 관현악 등으로 활동했다.
1933년 작품발표회에서 “나그네의 마음”이 연가곡풍의 작품 발표와 독일 낭만주의 작품의 견실한 발판으로 현제면, 홍난파의 작품 경향과 다른 새로운 음악계에 등장하였다.
1940~1945년대에는 창작음악분야는 극심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위축되었으며, 이 시절에도 김동진은 만주의 신경 교향악단에서 “양산가” 등 발표하고, 김성태는 한국 선율에 의한 “카프리치오”를 작곡, 초연하는 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5~1950년 광복 이후, 서양 음악계는 의욕적인 관현악 활동과 1946년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창설되어 서양음악의 발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5년 8.15 광복의 감격으로 서양 음악인들이 결속하여 오케스트라의 조직을 하여 현재명 등 음악인들은 고려 교향악단을 탄생시켰다.
1948년 김생려 등이 민간 활동을 표방하고 고려교향악단에서 나와 서울교향악단을 창설하였다.
1946년 국립 대학교에 음악부가 생겨서 이것이 음악대학으로 발전하여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나라 음악활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채동선의 교성곡 발표, 조두남 가곡집 “달무리", 윤이상 가곡집 ”달무리“ 펴내서 창작활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다.
1950년 현제명의 가극 “춘향전” 작곡하여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1950년 이후에는 전쟁의 참화 속에 해군 정훈음악대가 조직되어 음악활동이 유지되었다.
이후, 가곡 발표회에서 윤이상 “첼로 소타나”, 기대현 “콩쥐 팥쥐”, 나운 연 가곡집 “다윗의 노래” 등 발표하였으며, 1955년 한규동 편찬한 “한국가곡집”과 작곡가협회가 결성되었다.
1959년 최인한이 실험적 작품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경향의 서양음악이 수용되다가 1960년 중반에서부터 본격적인 현대풍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