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의 생애와 작품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저널리스트 클로비 고갱과 페루 출신의 페미니즘의 선구자이며 사회주의 리더인 플로하 트리스탄의 딸인 알리나 마리아 샤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850년 정치적 환경으로 고갱 가족은 파리를 떠나 페루로 떠났으나 여행 도중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페루 리마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살았다.
그는 7살 때,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서 친할아버지가 사는 올레앙으로 이사를 그곳에서 채소와 청과물을 판매하였다.
그는 14살 때 파리의 해군 예비학교인 로올 인스티트에 입학하여 3년 후에 해군에 입대하여 2년간 근무를 하였다.
1867년 7월 7일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1871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 주식거래 중개인이 되어 11년간 일을 했으나 주식시장이 붕괴되자 수입이 줄어들어 전업 화가가 되기로 했다.
1873년 덴마크 출신의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을 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884년 가족과 함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방수포 판매 사업을 했으나 실패를 했다.
그는 1885년 파리로 돌아왔으며, 그가 살았던 브뤼에르 가 15번지 인상주의 화가들이 드나들던 카페와 갤러리를 방문하면서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구매했다.
1887년 보지라르로 이사하여 작업실이 있는 집을 구매하면서, 1881년과 1882년에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인 “보지라르의 시판용 채소밭” 등을 출품하였다.
1883년 10월 그는 전화화가를 결심하여 다음해에 가족과 루앙으로 이사를 했으나 그 해말 메르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가자 그도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
1886년 5월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19점의 그림과 한 점의 목조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림 대부분은 루앙 또는 코펜하겐에서 그림 작품 등이었으며, “목욕하는 여인들”작품을 소개를 했다.
그는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그림 “목욕하는 브르타뉴 소년들”은 드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스케치들은 후일 파리 작업실에서 물감작업을 실시했는데 “브르타뉴의 네 여인”이었다.
그는 인상주의에 실망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미술에 매료되었으며, 유럽에서 유행했던 자포니즘에도 매료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전형적인 클루아조니즘 작품으로 인용된 것은 “황색의 그리스도”이었으며, 1887년 그는 파나마를 방문한 수, 마르티니크의 생피에르 부근에서 친구화가인 샤를 라발과 함께 6개월을 지내면서 10~20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는 인디언 이주민 공동체와 접촉을 하면서 이국적인 장소와 원주민에 관심을 가진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8년 테오의 주선으로 빈센트 반 고흐와의 노란 집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생활을 하였으나 두 사람관계가 악화되면서, 1888년 12월 23일 저녁 빈센트는 면도칼로 고갱과 맞서다가 빈센트는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잘랐다.
1893년 11월 드가의 주도하에 뒤랑뤼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나 드가는 칭찬을 하면서 “음울한 여인”을 구매하였다.
후 일, 드가는 타히티 여행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고갱이 1895년 개최한 경매에서 그의 그림 “망고를 든 여인”을 구매하였다.
1891년 4얼 1일 타히티르의 여행목적은 인공적이고 관습적인 유럽의 문명사회를 도피하기 위한 것이며, 여기서 이주하면서, “바닷가에서” “마리아를 경배하며”와 같은 타히티 생활을 묘사한 그림을 그린 것이, 그의 타리티르 그림 중에 대표작이 되었다.
그의 타리티르 여인을 모델로 그림 최초의 초상화는 “꽃을 든 여인”이며, 이는 폴리네시아 여인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다음해 20점의 작품과 12점의 목판화를 만들었으며, 첫 번째 작품은 “그저께오이의 씨앗”으로서 오로 신의 지상의 아내를 나타내었다.
1893년 8월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신의 날”, “신성한 봄”, “달콤한 꿈”과 같은 타이티를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렸다.
1894년 11월 그는 듀랑 뤼엘 갤러리의 전시회에서 성공을 거두어서 전시한 40점 그림 중에 11점이 판매되었다.
1895년 9월 타히티에서 6년간 살며 푸나우이아에 갈대와 짚으로 집을 만들어 작업실로 하여 조각에 집중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신의 아들”과 “네버모어”같은 성이 부각된 누드화 연작을 그렸다.
1897년 4월 사랑하는 딸 알린이 폐럼으로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슬픔과 건강 악화와 빚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을 했다.
그는 1901년 9월 16일 히바 오아섬의 아투 오나에 도착하여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인근 계곡에 살던 원주민 부부의 14세 된 딸을 안내를 맞이하여 딸아이를 출산했다.
여기서 작업한 그림 3점은 “부채를 든 여인”.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미개한 이야기”작품이 있다.
1903년 그는 몸이 쇠약해서 모르핀에 의지하다가 1903년 5월 8일 아침에 돌연사를 했으며, 히바 오아 섬의 아투라에 있는 가톨릭 갈보리 공동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