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정치사상
1. 생 애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중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르피눔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지역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학문에 뜻을 두었던 장남인 키케로와 동생 퀸투스를 로마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군복무를 마친 후, 기원전 91년부터 기원전 82년까지 법학자 스카 이볼라에게 법률교육을 받았으며, 연설가인 클라수스와 안토니우스에게도 수학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변론가 활동을 하였으나, 당시 철학적 회의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에서 아카데미에서 필론과 디오도 토스에게 배웠다.
그는 중간 서열의 공적인 재무관, 조영관, 법무관을 거쳐 63세에 로마공화정의 최고 공직의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에 맞선 카틸리나의 모반을 제압하는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으나, 수많은 정적이 생겼다.
그는 처음은 조국의 위기를 구한 인물로 칭송을 받았으나, 그 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비난으로 1년 반 동안의 유배생활을 했다.
그 후, 정치적으로 실각한 그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서 기원전 44년까지 저작에 집필하는데 집중을 했다.
그는 카이사르가 죽자 다시 정계에 복귀해 무너진 공화정 복원에 힘 쏟았으나, 카이사르의 추종자들에게 그가 지키려고 했던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43년 12월 7일 살해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2. 정치사상
키케로의 “국가론”은 내용상으로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부터 내려온 전통 아래이었으며,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특징이 있다.
철학적 교양이 높은 공적인 사람들의 대화 형태로서 좋은 공동체의 조건과 그 구조에 관하여 철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이며 현실정치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영원하고 신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관료적 삶이 정치적 삶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관조적 삶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는 앎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했다.
물론, 활동적 삶 역시 앎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 과업을 수행하는데 그 의미를 얻는다는 점이 차이라고 했다.
그는 공동체를 인민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놓고 그것을 공통의 법과 공통적 이익에 근거해 정의할러고 했다.
그는 공통의 법과 공통의 이익에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인 사회를 이루려는 충동은 인간의 약한 측면이 아니며 본성적인 자연스러운 충동이라고 했다.
이러한 것은, 국가 이전에도 법에 대한 이해가 존재한다는 사유로서 뒷받침이 되어 다양한 국가 형태와 정치체제에 대한 개관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는 국가론에서, 정치사상의 전통에 따라 공동선을 위한 좋은 정체와 지배자의 이익만을 위해 기능하는 나쁜 정체에 대한 구분이 된다고 했다.
즉, 군주정에서 시민에 대한 자애가, 귀족정에서도 최고로 훌륭한 사람의 통찰력과 조언이, 민주정에서는 인민의 자유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정당한 정체도 명확한 약점이 있으며, 군주정은 신민이 국가 대소사의 결정과정에서 제외되는 약점이 있으며, 귀족정에서도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적은 정도의 자유만 허락한다고 했다.
또한, 민주정에서는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구성원 각각의 가치에 따른 차별화가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고 했다.
즉, 군주정은 참주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다수의 폭정으로 될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형태의 타락한 정체는 법 공동체일 수 없으므로 공동체라고 할 수 없으며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에 언급한 좋은 정체의 특징을 골고루 섞어 만든 혼합 정체가 이상적인 정체라고 했다.
그는 준-군주정이나 귀족정, 특히 시민공동체에서 시행되는 결정권한의 분립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권력분립은 상호견제보다는 일치와 통합을 위한 것으로서, 그렇게 해야만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민의 것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그의 정치사상은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까지 큰 영향력을 유지하여 가장 높이 평가받는 사상가로서 자리매김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