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통한 지도자가 된 간디
모한다스 간디는 어린 시절부터 학우들과 어울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몸은 허약하고 자신감이 없어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싫어했으며, 친구들과 힌두교에서 금지한 육식을 경험하고 도둑질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작은 대학에 좋지 않은 성적으로 간신히 들어가 1년을 채우지 못했으나 인도보다 변호사 자격취득이 쉽다는 정보를 듣고 영국에서 몇 년 후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천성적인 대중 공포증 때문에 법정에서 사람들 앞에 제대로 말할 수 없어 변호사로 소송인들의 진정서 서류를 작성해 주고 수수료를 받아 생활했다.
1893년 회사로부터 변호사 제안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면서, 이등칸의 표를 가지고 앉았으나, 역무원이 짐칸으로 옮기라 했으나 거부하자 역무원은 경찰관과 함께 기차 밖으로 짐과 함께 던져버렸다.
그는 혹독한 추위에 떨며, 모멸감을 느끼며 이는 자신만의 모욕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과 유색인 전부가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부당한 차별을 뿌리를 뽑아야겠다는 생각 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많은 인종차별과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온몸으로 인종차별을 경험했던 그날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영국 유학 시절 관심을 가졌던 종교적 물음들이 현실의 삶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다양한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힌두교와 다른 종교도 연구하고 싶어 했으며, 베이커의 소개로 기독교 기도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종교 일기장”에 기독교에서 받은 인상을 기록했으며, 종교에 대한 오랫동안 토론 하곤 했었다.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웰링턴 부흥회에 헌신적으로 참석하면서, 삶들의 진실한 신앙을 이해하고는 감탄했으나, 자신이 종교를 바꿔야 할 이유는 찾지 못한 것은, 오직 기독교도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 친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지만, 좌라는 생각 자체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며,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냥 불안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의 편협함을 가장 경계했으며, 자신의 종교인 힌두교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힌두교의 수많은 종파와 카스트, 불가촉천민 등의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힌두교의 경전이 신의 영감에서 나왔다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종교들의 경쟁적 속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여, 자아와 신의 본질에 관하여 의문 갖고 힌두교의 여러 경전과 관련된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의 종교 공부는 도덕으로 귀결되어 세계의 어느 종교이건, 동일한 기본 원칙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 종교의 본질은 도덕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랑과 헌신은 모든 세계 종교의 근본 원리였으며, 모든 종교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신에 이를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으나, 결국 명칭과 표현만 달리할 뿐 본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온 우주에는 신비로운 힘이 충만하며 이 힘은 영구불변의 유일한 실재라고 보았으며, 그 힘은 선을 위한 힘이며, 이는 도덕률이라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사원이나 동굴에서 명상, 예배 의식, 신과의 영교(靈交) 등을 통해서 신을 찾지 않고 동포들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통해 신을 구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통해 신을 구축해야 하며, 믿음이 아닌 행위를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 함으로써, 개인적인 구원과 해탈에 중점을 두는 힌두교 정신에 상대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에 관한 모색은 독서를 통하여 삶에 적용하여 미각의 통제로서 채식을 고집했으며, 단것과 양념 섭취를 중지하고 녹말로 된 음식을 안 먹고 우유와 고깃국을 먹지 않고 빵과 과일로 살았다.
그는 교육에서 노예의 쇠사슬을 끌고 정규교육을 받느니 자유를 위하여 무지한 채로 돌을 깨는 편이 낫다고 하여 세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뱀이 나를 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뱀으로부터 도망갈 것을 맹세한다.”라고.” 비유했으며, 그의 삶은 “ 종교적 진리에 대한 실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종교적 진리를 실험했으며,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는 아쉬람을 통해 자신이 진리로 생각하는 무소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으며, 농민 해방운동을 펼치며 방직노동자 파업을 지원하는 등 비폭력 저항운동을 구체화했으며, 영국에 대한 비협조 운동으로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했다.
1922년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독립운동에 위협을 느낀 식민 정부는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명실공히 인도국민회의의 최고 지도자가 되면서, 인도 국민의 정신적 등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