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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정치 사상과 철학

 

정치사상

정치사상과 철학

 

 

 

 

1. 백범 김구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백범 김구는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이 나라의 철학이 쏠리고 저 민족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 추태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현상은 로크(Locke)의 철학을 믿는 자들은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는 자들은 모스크바를 서울로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며,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일제시대의 동경을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는 독립 사업에 헌신하다가 죽더라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시체를 성벽으로 삼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를 발판으로 삼아 민족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 삼아 민족문화의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평생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상은 나라는 내 나라요 남의 나라가 아니며,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이 안 될 수 없고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된다고 하였다.

그의 평생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며,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다가 죽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그는 민족의 최고 임무는 남의 간섭도 받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지도 하지 않은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자주독립 없이 민족의 생활 보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이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 없다고 하였으며,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며, 인류의 세계는 생활의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며,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담당할 천직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정치이념은 자유로서, 이러한 자유는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자유라면, 레닌의 말대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는 독재의 나라가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독재의 나라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을 제외하고, 국민을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독재 중에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로서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고 하였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중에서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 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라고 하였다.

이러한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참다운 문화는 소멸이 되고, 원기는 마멸되었으며,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여 예술, 경제, 산업에 영향이 미치게 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국민이 힘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빠른 진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끝내 병통이 생겨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 보기위한 절차 또는 방식이지, 그 내용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의 복종이 민주주의라고 하였으며, 이를 통한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이나 정책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이를 제한하는 것은, 오직 헌법의 조문뿐이라고 하였으며, 헌법 또한 독재주의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 있는 나라의 백성인 주권자라고 하였다.

그는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되며,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개인을 포함한 국가에서도 해가 된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2. 우남 이승만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우남 이승만의 세계관은 자유민주주의의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로서, 종교의 자유와 기독교 지향적이었으며, 문명의 개화와 부국강병으로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과 건국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민족주의였으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20세기 초 한국 사람으로서,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생된 공동체 의식이라 할 수 있다.

1930년 호놀룰루에서 소집된 동지회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동지회의 권력을 개인의 명예를 위해 남용하지 않고 일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언행이 일치한 지사(志士)였으며, 현실정치의 무상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정치이념과 지적 능력을 발휘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194628일 북한은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그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두려워서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하였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 싹을 강력하게 짓밟아 놓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립 혹은 합작을 거부하는 일관된 방공. 반탁의 길로 간 것이었다.

그의 반탁 운동사상으로 친탁을 지지한 남로당을 제외한 비 좌익계 국민을 단결시킴으로써, 해방 후, 좌익우세였던 정치풍토를 우익우세로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의 반탁운동 덕분에 한민족은 강대국의 5년 신탁통치를 면하고, 3년 만에 자율적으로 남한만의 유엔 감시하에 19485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해방 후, 해외에서 귀환한 이승만 등의 자유민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국내에서 성장한 정치단체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건국 후,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새로운 나라의 국시로서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정치이념을 제시하였으며, 더 나아가 여당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일민구락부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민주의 사상은 신분, 빈부, 남녀, 성별 차별 등을 철폐하여 하나가 되어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자유민주주의가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했다는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군주정치의 압박에 저항하며 미국인들이 일으킨 독립혁명을 모범을 삼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의 사상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권리와 복리를 누려야 하며, 자유민주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중시하여 남녀동등과 지방색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의 성품은 혁명가로서 수많은 불목과 충돌을 긴 세월 동안 굽히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에 대한 많은 비판자와 정적을 만들어 냈으나, 실패에 직면할 때마다 용기를 내어 자포자기를 하지 않은 데 있었다.

 

 

 

 

 

3. 도산 안창호의 사상

 

 

 

도산 안창호는 1878119일 평양성 밖 대동강 변의 봉상도(도롱섬) 조그만 섬마을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몽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비 집안이었으나 농토가 없어 경제적으로 곤란했으며, 일가친척 가운데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 전형적인 잔반(殘班)이었다.

그는 7살 때에 부친이 돌아가자, 할아버지 밑에서 국수당에 천자문을 배우다가 9살에서 13살까지 십정 거리의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으며, 14살에서 15살까지 한문, 동몽 선술, 소학 등 기초적인 지식을 배웠다.

그는 동학 농민 봉기가 일어난 189416살 소년이었으나, 갑오개혁으로 마지막 과거시험이 있었으나 가난하여 시골 서당에서 공부한 실력으로 어림없다는 생각에서 시험에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15살 때에 한양과 평양을 다니던 자주독립, 개화 자강의 사상을 갖고 있는 우국 청년 필대은 만나 친형제처럼 지내면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였다.

그는 청일전쟁과 동학 농민 봉기 와중에 한양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막노동하면서, 먹고, 잠재워주고 공부를 시켜주는 구세 학당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구세 학당에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우면서 성경과 교리문답, 기도하는 법도를 배웠으나, 18세 때에 할아버지가 이석관 큰 딸인 13세의 시골 소녀 혜린과 약혼을 정해지자, 종교와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혼인을 거절하였다.

이석관 가족은 약혼녀를 한양으로 데리고 가서 기독교와 학교를 시키라고 하자, 그는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약혼녀를 서울로 데리고 와서 정신 여학교에 입학시키는 배려하는 인간미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서재필의 연설에 감동받아 배재학당에 토론서클에 가입하여 서재필과 윤치오 등과 정기적인 토론 참여를 하게 되었으며, 서재필의 논리 정연한 연설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로 하여금 일생을 나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고 충격을 받은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던 문명개화의 길에서 현실적인 구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필대은과 같이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평양과 한양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석상에서 유명한 웅변을 함으로써, 지명도를 가졌을 때는 이미 서재필은 압박을 피해, 18986월 도미를 했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인 독립 자주와 민권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웅변 실력으로 1만 여명이 운집한 만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독립 자주와 입헌의회설립, 문명개화의 목표였으나, 정치단체로 전환되면서, 정치의 공감대 부족과 대안 및 리더 십 부재로 수구파의 탄압에 실패하였다.

그는 외세에 의존적이면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을 검거할러고 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필대은과 같이 도피 하였다.

그는 필대은이 병으로 죽자, 큰형인 안치호가 이사를 간 강서군 동진면 바위고개에서 계몽학교라는 남녀공학인 사립학교인 초등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계몽학교라고 했다가, 불타서 신축했을 때는 점진학교로 바꾸었으며, 교육과 개간 사업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봉건적 사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권사상을 고취 시키려고 했었다.

그는 수구파의 감시와 탄압이 강화된 정세에서 운영난으로 곤란을 겪자, 점진학교를 문닫고, 부강한 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직접 보고 배워 돌아와서 구국운동에 나서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24살 때에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양역 앞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김윤오 주선으로 밀러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인 그는 아내와 같이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에서 부부가 드류 의사 집에서 기거하면서, 하우스 보이로 일을 하다가 몇 개월 후에 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 영어를 익히기 위해 그래머 스쿨 과정에 나이 관계로 겨우 입학하였다.

그는 낮에는 노동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동포들 집을 방문하여, 이들을 설득하여 5~6명의 인삼장수들을 모아 중국인 교회를 빌려 주일마다 설교를 하면서 동포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자, 1년 후에 동포들과 상황 친목회를 발족하였다.

그는 친목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후에 거주지를 LA로 옮겨가서 리버사이드에서 18명의 한인 이민 노동자들과 공립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귀국하기 전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입헌군주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조직의 보안과 지속성을 위해 일회(一會)를 미국 가주 하변성에서 대한 신민회라는 발기를 하였다.

그는 30살 때에 19081월 초순에 신민회 취지에 동의한 동지들이 모여 정식 창립대회를 발기인 5명이 개최하였으나 나중에 몇 명이 추가 되었다.

그는 190931살 때에 국내 최초의 청년 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인재 발굴과 훈련을 시작하였으며, 1031일 안중근 의사사건으로 용산 헌병대에 구금된 후, 영등포 형무소로 수감되었으나 1221일 석방되었다.

191019일 그는 다시 구금되어 40 여 일만에 석방되었으나, 그가 활동하는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전쟁 준비 등의 구국운동이 주축이었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샌프란시스코 친목회, 공립협회 등의 조직 경험을 활용하였다.

일본 경찰이 신민회 105인 기소 사건은 600여 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하였지만 조직의 전모가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1910년에 망명을 결정하여 북경을 거쳐 블리디 보스토크로 도착하였으나 망국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으며, 191133살 때에 재러 한인 학교를 설립하고, 다음해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 운동을 하였다.

그는 35살 때에 발기인 20명으로 흥사단 창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사무장으로 조직 전반을 총괄하면서, 흥사단을 상징하는 기러기 깃발, 마크, 입단가 등을 직접 제작하였으며, 조직원의 단결과 일체성을 고취해 민족을 떠받치고 나갈 일꾼들의 사명감과 의무를 체계화시켰다.

그는 192143살 때에 국민대표회의 발기회를 결성하여 준비 위원회 회장으로 되었으며, 1125일에는 대한적십자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46살 때에 중국 여권으로 상하이 출발하여 요코하마, 호놀롤루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하여 미국 각지의 순회강연과 흥사단 조직을 점검하면서, 동아일보에 동포에 고하는 글을 연재하였다.

그는 48살 때에는 한국독립 유일 당인 북경 촉성회를 결성하고, 다음 해에 길림시에서 강연 중에 중국당국에 체포되었으나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52세 때에 흥사단 원동회를 개최한 후, 우파 세력을 결집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다음 해에 흥사단 본부에서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54살 때에 대일 조선 통일동방회의 열어 강령, 정책, 조직 등 토의로 결정했으나, 이유필 집에서 체포되어 안경호 편으로 국내로 압송되어 4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30년 독립운동에 겨우 4년 징역이라는 소감을 말하고, 항소를 포기하고 대전형무소에서 칠 공장에서 노역하였다.

그는 57살 때에 가출옥하여 대보산 자락에 은거하며 송태 산장을 짓고 강연회 대신 만찬회로 회집을 하였다.

그는 5919376528일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전향을 거절하여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되었으나 간경화증과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으로 일제 재판 도중에 1224일 병보석으로 나와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는 193831080여 일을 입원했으나 60세 나이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지에 비석조차 없이 묻혔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은 일본의 신식 무기 앞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 투쟁은 과거 동학 농민 봉기나 단발령 때의 의병부대와는 달라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군인, 헌병, 경찰이 거미줄처럼 감시하에서는 독립협회식의 단체로는 안 된다며, 비밀조직을 해외조직과 동시 추진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었다.

도산 안창호의 헌신적인 사상은 교포사회에서도 깊은 뿌리를 내려서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의 큰 힘이 되었던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은 경험을 통한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민주적이며 유능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평생 나라를 위하여 독립과 조선 혁명을 위한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는 명예와 돈에 탐욕 없이 이성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이며, 성공보다 실패가 많아도 좌절과 몸부림 속에서도 올바른 판단과 분석으로 조국이란 대의 앞에 철저히 지켜온 사상을 오늘날의 정치지도자는 배워야 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해방의 기쁨도 보지 못하고 갔지만, 국민의 고통 없는 희망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흥사단이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글을 마친다.

 

 

 

 

 

4.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의 사회개혁 사상의 골격이 되는 것 중에서 경제 유표는 중앙행정에 관한 개혁구상이며, 국가의 기본적인 재건 방향을 추구한 요체이었다.

이 책은 강진 유배 시절에 저술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맺었지만, 저술의 동기는 사회는 무엇 하나 병들지 않는 것이 없어,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친 후에 고치게 될 것이므로 충신과 열사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세유표는 처음부터 천관이조(天官吏曹)에서 주례(周禮)의 이념과 제도를 조선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려는 근본구상을 펼쳤다.

, 궁극적 지표는 부국강병에 두고 중앙의 인사 행정기구를 개혁하는 데 있었다.

지관호조(地官戶曹)에서 주례의 이념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 국가의 가장 시급한 것은 전정(田政)으로써, 재정개혁의 문제를 토지제도의 문제와 직결시켜서 기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동관공조(冬官工曹)에서 주례체제를 기준으로 상공업의 발전 문제를 기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여기서 개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다루면서, 부국강병론과 이용수행론이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금은의 국외 유출을 통탄하였으며, 차나 인삼을 재배수출과 기계나 말 같은 생산적인 것을, 수입을 강조하고, 국내의 통화개혁을 위해 전환서 설치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북학사상을 강조하고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용감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는 봉건제의 물질적 기초인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농촌경제를 재편성하고 농업을 공동농장으로 재생산하여, 분배는 원칙적으로 노력에 따라 분배해 나가한다는 개혁론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지주제를 타도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을 재편하는 문제까지 접근하였으나, 이는 지금 현실적으로는 실현성이 없는 급진적이고 환상적인 구상인 것 같은 생각이 던다.

결국, 중세 봉건사회를 극복하려는 다산 정약용의 정치와 경제사상은 중앙인사행정 기구에서부터 재정문제, 상공문제, 토지개혁론까지 광범위한 것은 경제적으로 전호제, 사회적으로 노비제, 정치적으로 중세적 벌열제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혁신적인 개혁론의 이념적 기반은 경학론에 있는 것으로서 볼 때, 정치 경제론과 경학론의 종합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5. 안중근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젊은 시절의 안중근은 장부가 한 번 태어나서 큰 뜻을 가지게 되면, 시대가 영웅을 알아주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서양 문물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날로 어지러워서 탐관오리뿐이니, 장래가 예측할 수 없어, 올바른 선비로서 벼슬을 하여 공명을 떨칠 수 없다고 하며, 깊은 산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므로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피와 땀으로 투쟁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때문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나라의 사직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움을 구해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였다.

그는 나라가 위태할 때 필요한 것은, 구국 영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애국지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고, 민중이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하고,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되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

더욱이 일본이 조국을 침략하여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여 명성황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자, 그의 분노가 거대한 산맥처럼 가슴을 짓눌러 와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본 침략을 격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1명과 단지동맹을 맺어서, 무명지를 자르면서, 나약한 마음을 다그치고, 의병 활동으로 죽은 동지를 위로 하면서,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투쟁을 하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러 가는 자와 죽음을 마지로 오는 자가 모두 같은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두고 죽음의 길로 가는 그의 심정은 기적소리에 묻히고, 그의 생각은 오직 나라를 위한 무한한 영광만 있었다.

그의 정치적 행동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세 발의 총성은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을 쏜 것이 아니라 조선과 민주를 침략한 일본의 심장을 쏜 것이었다.

 

 

 

 

6.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한 실체는 무엇인지 현대까지 학술 논저나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공한 문헌적 근거들로 하여 대체적으로 파악할 뿐이었으며,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이었으나, 그 존재성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으므로, 필자는 여러 문헌을 통하여 나름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그는 희랍 세계에서 못생긴 사람이지만, 유명하게 된 인물인 것은, 못 생김에 내재한 잘 남으로, 모름을 앎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개인적인 다이모니온신에게 자신의 정신적으로 인도하는 영적 존재를 고백하는 신비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는 지식의 출현은 아테네의 민주화 시대 및 소피스트 운동의 시대라는 역사적, 지성사적 상황의 산물로서, 그의 정치철학적 사유로 발전하게 되는 외적 계기이며, 민주화 시대의 아테네 정치 및 소피스트 운동에 대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 70세에 국사범으로 기소되어 처형을 당하는 최초의 지식인으로서, 국가 생활의 문제, 인간의 삶의 방식, 도덕성의 문제 등 앎의 대상으로 추구한 최초 정치철학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의 내용은 포괄성, 체계성, 창의성 등에 대하여 정치철학자마다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나, 그의 철학은 체계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원초적 형태로서 완숙한 형태가 아니었으며, 그는 민주주의의 이상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아테네에서 민주정치의 이상이 나름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었다.

,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이나 평등이라는 이름의 오만이 횡횡하는 민주정치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떤 신적이며 영적인 존재가 자신이 좋지 않거나 옳지 않는 일을 할 때마다 행동을 억제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일생 동안 처음으로 관직을 맡은 것은 민회의 사무를 관장하는 상임위원회에서 한 달 임기의 의장직을 수행할 때 민회의 결정에 혼자만 반대하여 불복한 행동에 대하여 민회의 시민들은 다수가 그를 호응을 하였다.

그는 투옥이나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의에 저항하였으며, 죽음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을 하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었다.

그는 감옥서 탈옥을 하지 않고 사형집행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표명한 것은 특정한 법의 규정이 나쁘거나 정의에 어긋나더라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었다.

그의 정치철학의 태동은 소피스트들의 인문학 및 수사학 이념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시작을 의미하였으며, 스스로 모름과 모자람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들과 아테네 국가 전체가 자각하지 못하는 모름과 모자람을 깨닫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지적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른 저술도 남기지 않은 이유는 인간들을 직접만나고 대화하는 삶을 즐기느라 저술 작업에 몰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는 대화라는 행위를 통한 깨달음으로 충분하다는 확신 때문에 저술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보고 싶은 것이었다.

 

7. 플라톤(Platon)의 정치사상

 

 

 

 

플라톤의 사상

 

 

플라톤의 사상은 3기로 구분하면서, 1기는 소크라테스 학설에 복종하여 선()에 관한 견해를 해설과 옹호를 하였다.

2기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존중하면서 비판적으로 논했으며, 저서는 국가의 이론을 정리한 국가론이 있다.

3기는 소크라테스 학설뿐만 아니라 종래의 사상을 널리 연구하여 소화하고, 이를 소재로 하여, 자신 학력 체계를 수립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정치학 의의를 논한 정치가론, 법의 의의와 입법정책을 논한 법률론이 있다.

 

 

형이상학적 기초

 

 

플라톤은 정치 학설에서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였으며, 인식론에서 사상=존재물과 관념을 분리 대립시켰다.

관념의 세계는 세상 정신 또는 이성이 지배하는 곳이므로 이 세계는 이성과 사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라 하였다.

현상세계는 개개의 존재물은, 개개의 존재물보다 존재하는 관념계의 본질적인 것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한 심리적 기연을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인식론은 관념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매개자는 에로스(사랑)라고 하였다.

플라톤의 윤리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學恩에 입은 봐가 크며, 관념 계만이 진과 선의 세계이며, , 미의 세계라고 하였다.

플라톤의 세계는 진선미를 중심으로 삼는 여러 가지 힘의 회전이라고 하였으며, 윤리 설은 순수한 사회 본위이며, 정치사상은 순전한 국가 본위주의였다.

모든 인간 행위는 사회 본위와 국가 본위로 향해 포괄되어, 개인의 선, 개인의 행복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국가의 행복과 안녕이 요구된다고 했었다.

플라톤의 관념은 이데아가 만물의 척도였으며, 관념이 우주 만유의 원인인 동시에 사회공동체의 정의 관념이며, 모든 인간을 공동체로 결부시키는 이념이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그리스 사상의 관념론과 사회 본위 사상을 결합한 최고 도덕이라고 보는 것이 국가를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8.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정치사상

 

 

 

대표작

 

 

1) 정치학(politics)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완성한 것을 제자들이 편찬하였으며, 내용은 오늘날과 거의 같으며 정치사상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2) 니코마스 윤리학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헌으로서, 정치학, 경제학과 더불어 인간 사항에 관한 실천학의 중요 부분이었다.

 

3) 아테네의 국가 제도

1880년 일부와 1991년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것이 발표되었으며, 이는 아테네인의 국가 제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4) 형이상학적 기초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반대하여 현상계의 개체를 떠나서는 실제란 없고, 실체가 개체에 내제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형상(形相)과 질과(質科)의 이론이었다.

형상이라 함은, ()로 하여금 물()로 화()하게 하는 본질이며, 질과(質科)라 함은 실재의 소재라 했었다.

,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했었다.

 

 

 

플라톤(Platon)과의 비교

 

 

그리스의 2대 사상으로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해설해서 대성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사상을 계승하면서도 플라톤의 사상을 비판했었다.

플라톤의 연구 방법은 연역적인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인 방법이었다.

플라톤은 이상과 이론에 중점을 두고 현실을 제2차적으로 보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에서 출발하여 현실적 사실을 중요시하고, 윤리적 분석보다 현실적 경험, 관측, 추리에 중점을 두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론을 통해 일대사회 개조론을 전개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인을 위한 정치가론을 발표했으며, 정치학 연구방법론에서 비교법을 사용한 선구자였다.

플라톤은 윤리주의를 고수하면서, 실증주의를 택했으며, 성격적으로는 정열적 인간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이지적)理智的 인간이었다.

 

 

 

 

 

9. 몽테스키외의 정치사상

 

 

 

대표작

 

 

1) 페르샤인의 서한

리카와 유스베크라는 두 사람이 유럽 여행을 하면서, 고국 사람과 교환한 서환 집의 형식으로서 정치문제를 다루었으며, 내용은 시국을 본질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파리 사람들에게 찬양받았다.

 

2) 로마인의 흥망과 그 몰락의 원인에 관한 고찰

이 책은 단순한 역사라기보다는 사론에 해당되었으며, 내용은 로마의 흥망은 현대 민족국가에서 대국민군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 위에 평등한 국가의 기초를 두었다는 데 기인한 것이라고 했으며, 로마의 몰락은 당쟁보다도 정신적인 타락에 기인한다고 했었다.

 

3) 법의 정신

이 책은 17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간되었으나, 저자의 이름도 없이 어머니 없이 생긴 아들이란 표어가 적혀있었다.

내용은 31권으로 된 대작이었으며, 정치학이라기보다 사회과학 일반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원명은 로마법승계로서의 프랑스 및 봉건제국가의 법에 관한 연구로서의 정치, 풍토, 종교, 무역 등에 관한 법의 정신 또는 그 연구라는 긴 이름이었다.

몽테스키외 저서의 공통적인 근본적인 사상은 실증주의로서, 사회현상의 필지적(必知的) 관계와 필연적 발전을 생각하였으며, 언제나 사회현상을 법칙적인 면에서 이해할러고 노력하였다.

 

 

정치사상

 

 

1) 법의 본질

법과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법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물의 성질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은 법을 가리는 것이며, , 물질적 세계, 초인, 야수 및 인간 모두가 각자의 법을 가진다고 했었다.

자연법에 있어서는, 종교법, 도덕법, 공법, 사법 등은 인간의 구조와 존재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성립 이전의 인간을 고찰해야 한다고 했었다.

실정법에 있어서는, 인간은 사회 상태에서는 의식을 잃고 평등이 소멸되어 전쟁상태가 일어나므로 인정법(人定法)을 낳게 되고, 필연적으로 거대한 지구의 각종 인간의 만민법이라는 상호교섭 관계를 규정하는 법을 가진다고 했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의 치자와 피치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정치법과 구성원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시민법이 생긴다고 했었다.

 

2) 정체론

 

(1) 삼권의 정체

삼권(三權)의 정체에 있어서, 몽테스큐는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나누었다.

공화정체는 인민이 일체로서 또는 인민의 일부분이 주권을 가지는 정체이며, 이런 공화정체는 민주정체이며, 인민이 일부분이 주권을 가지는 경우의 공화정체는 귀족정체라고 했었다.

군주정체는 1인이 고정적으로 정립된 법에 의하여 통치하는 정체라고 했었다.

전제정체는 한 개인이 법칙도 없이 자기 의지와 자의에 의하여 통치하는 정체라고 했었다.

 

(2) 정체의 성질

정체의 성질에 있어서는, 민주정체는 인민 전체가 주권자인 동시에 피치자라고 했었다.

귀족정체는 주권은 소수자의 수중에 있으며, 소수자만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고 했었다.

군주정체는 1인이 근본법에 의하여 통치하며, 군주는 모든 권력의 원천이므로 근본법은 권력이 통과하는 중간 통로라고 예정했었다.

전제정체는 전제군주가 그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게 된다고 했었다.

 

(3)정체의 원리

정체의 원리에 있어서는 공화정체는 덕성이며, 순수하게 정치적 의사의 덕으로 조국애와 평등애라고 했었으며, 특권, 등급 및 출생에 의한 귀족을 예상했었다.

전제정체는 덕성과 명예도 아닌, 인간 모두가 평등하므로 누구도 우월을 주장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러므로 인간 모두가 노예이므로 누구에게나 우월하지 않으므로 공포의 원리라고 했었다.

제한 정체는 법과 세력 자체에 의하여 유지되므로 마음먹은 대로 온화 정책을 해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었다.

 

 

 

 

10. 칸트(Kant)의 정치사상

 

 

 

대표작

 

 

저명한 저술가인 칸트는 최초 결정적인 것은, 1789순수이성비판이었으며, 생전 57년에 걸쳐 70편의 논저를 발표하였으며, 이외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영구평화론, 도덕형 이상학, 인간학 등이 있다.

칸트의 사상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인류의 사상과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철학

칸트의 인식은 형식과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으며, 형식은 시간, 공간, 범주는 선험적으로 의식 일반에 있는 것이며, 내용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험(인식)에 앞서 물자체인 감각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이성의 능력은 이념의 작용, 도덕적 행위, 미의 관조에 있어서 나타난다고 했었다.

여기서 이념이란, 과학적 인식에 있어 적극적 의의를 가지며, 모든 이념은 세계, 영혼, 신에 있어서 변증론적인 가상이 전개된다고 했었다.

칸트는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더럽고 지저분하며, 자기의 관능적 향락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노예로서 때론 나쁜 일을 한다고 했었다.

반면, 예지인은 신성하며 언제나 선을 행하고, 악을 미워하며, 나쁜 일을 할 경우 뉘우치고 깨닫는다고 했었다.

 

국가론

 

 

칸트는 국가란, 법률하에서 다수 인간의 집단이며, 법률은 필연적, 선천적이라고 보아야 하며, 외부적 권리의 개념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었다.

국가일반의 형태는 순수한 권리의 원리에 따라 존재하여야 한다고 보는 국가이면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상 형태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현실국가를 평가하는 정상적 표준이 된다고 했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에 의해서 정치적 국가인 법률 국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덕 국가와 신국을 고찰했었다.

도덕국가는 인간을 단순한 현상인, 자연인으로만 보지 않고 그 본질을 인격, 또는 예지 인으로 보며, 철학에서 국가는 단순한 현상적인 법률국가의 관념에만 그치지 않았다.

삼권분립 론에서는 국가는 정치적 3조로 구체화 되어 있는 보편적으로 결합된 국민의 의지인 3권은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으로 구분하였다.

칸트는 국가형태를 첫째 표준으로서 최고 권력의 장악자가 누구냐, 최고 권력의 발동형식이 어떤 형태냐에 따라 분류하였다.

전자의 표준은 주권 형태인 국체의 분류이며, 후자의 표준은 정부의 형태인 정체의 분류로 하였다.

 

정치이론

 

사회계약론에서는, 인류는 하나의 사회로서 결합하는 온갖 사회계약 중에서, 인류 사이에 공민적 헌법을 설립하는 공민연합계는 매우 특수적이며, 그 실행에 있어 어떠한 것(똑같이, 임의, 공동적 목적)과도 공통되고 있으나, 그 설립윤리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했었다.

칸트는 공민적 상태의 3원리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유, 신민으로서의 평등, 공민으로서의 독립성을 언급하였다.

칸트는 국가는 각 구성원의 권리로서 분배적 정의를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법의 강제 작용을 수단으로 국가목적을 달성한다고 하였다.

국가의 목적은 각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치안유지와 외적을 막아내는 공동방위에 있다고 했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철학 체계의 일부로서 칸트의 평화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칸트의 평화에 관한 사상은 영구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필요한 적극적 조건과 소극적 조건 및 영구평화 실현 보장에 관한 것이었다.

 

 

 

 

11.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나는 자유롭다는 말할 때, 자신의 어떤 생활에서 속박이나 장애에 대한 부담에서 풀려났다는 의미를 뜻할 것이다.

, 자신의 허가나 금지에서 제한받지 않고 욕망이나 일시적 기분을 마음껏 만족시킬 기회를 가졌을 경우 자유롭다는 생각과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대생활의 특유한 속박에서 헤어나서 자유로움을 느낄 경우일 것이다. 또한, 나는 빚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젠 빚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흔히,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의지의 완성이니, 저항의 부재를 의미하느니, 정신 의지를 실행하는 능력 등이라고 하였다.

, 자유란 능력을 말하는 집단과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집단이라는 경우에, 자유를 능력이라는 견해는 자유를 능력 또는 힘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도덕철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속박의 부재라고 보는 견해이다. 또한, 속박의 부재라고 보는 견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때그때 욕구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한다.

반면, 인간의 자유에서 흔히, 방종이라는 것은, 비이성적인 욕망과 정열을 향한 탐닉과는 현저하게 대립되는 것과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자유란, 많은 가능한 속박이나 부담 중, 어느 하나와 대립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자유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비이성적 지배의 부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비이성적인 것의 침해를 이성적 능력으로 좌절시키는 것은 자기 규율, , 이성의 고유한 권위를 유지함으로써, 실현이 되며, 이러한 자유의 지배는 이성, 양심, 정신, 지성에 의한 지배라는 것이다.

자유에 관하여, 영어로 표현하면, freedom더 높은 자유를 나타내고, liberty더 낮은 자유라지만, 사실이 아니며, 영어의 용법에서 freedom이나, liberty 말은, 서로 적용이 가능하며, liberty는 법이나 정치의 문맥에 사용되고, freedom은 철학적이거나 일반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결국,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자발적 행동은 자신이 내린 결정과 행동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 이루어진다면, 자발적 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원인이 외부적 상황이나 행위자의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면, 이러한 행동은 강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행동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외부로부터 비난이나 처벌이 따르게 되면 그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에 관해서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하여야 할 한계가 있다.

현대적 자유에 단일적 개념은 행위자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또는, 무엇이 되거나 되지 않는데 가해지는 어떤 제약이나 제한으로부터 자유가 항상 문제 시 되어 왔다.

인간은 내면적 제약에서 벗어나면, 내면적 자유를, 외부적 제약에서 벗어나면, 외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인간은 이성으로 자신을 지배해야만 하는 것이지, 쓸데없는 욕망에서 벗어나면, 내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의 명령이나 사회의 관습을 자신의 이성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이것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므로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야 내면적 자유를 함양할 수 있다.

자유는 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동의하여야 하며, 복종하여야 하는 제약이 따르게 된다.

 

 

 

 

12.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1. 서언

 

 

현대 정치이론으로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 실현을 의미한다.

자유란, 의미는 개인의 권리의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주의로서, 다수의 국민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헌법정신(헌법전문, 4, 37조 등)에 의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분리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여기서 자유를 빼면서, 단순히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는 것은, 공산국가 등 인민민주주의 국가들도 민주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헌법정신이라 함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그들이 국민을 대변하고 결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이다.

 

 

2. 자유

 

 

자유는 인간의 인격이 핵심이며, 실재적인 본질은 자유이므로, 인간은 자유를 떠나서 인격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아의식을 가지면서, 자유를 추구하므로, 자유를 구속하는 여러 가지 조건에서 해방을 시도하여 왔다.

인간이 자유에 대한 희구(希求)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공동체 생활에서 자유는 바람직한 질서와 상응하는 책임이 전제되어 왔으며, 질서 없는 자유는 혼란을 의미하며,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자유에 대한 의무를 조화 또는 결합시키는 문제가 중요시 되어 왔으며, 이는 개인의 사적 자율성의 실현을 위한 경제적 자유주의와 공적 자율성을 확보할러는 정치적 자유주의와의 갈등이 내포되고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는 시장 자본주의 한 형태인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범주적 개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치의 가치에 회의적이며 개인적 이익추구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원리를 정당화하며,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필연적 기초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는 행복한 삶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의 출현에 비롯된, 이성적 불일치 상황을 정치적 결사를 구성하여 공존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적 자유의 목표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최소한 공통된 도덕관에 의존하며, 그 정당화의 규범적 기반은 합리적 대화와 평등한 존중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질서정연한 사회는 정의에 대한 합리적 견해를 모든 개인의 자발적 합의를 통해 수용하고, 정의의 원리가 공적 기본적인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회라고 했었다.

공동체주의는 윤리적 규범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며, 근대 개인주의의 보편화에 따라 윤리적 토대의 상실, , 정치적 공동체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 등에 의한 현상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한 제도적 틀로서, 강한 공동체 개념을 우선시하고, 우애적 감성과 자아 정체성의 공동체적 이해를 강조하여 귀속감이나 공동체 삶에 대한 정서적 갈망에 호소하였다.

 

 

2. 평등

 

 

모든 인간은 신으로부터 불가양의 권리를 부여받아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제도 등에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평등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평등에 대하여 구분하면, 개인 특성에 대한 대우와 배분에서 인간은 평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법 앞에 평등이라는 것은, 대우에 대한 평등(투표권 행사 등)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양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평등이다.(공리주의)

평등한 자에게 평등한 몫이 돌아가는 것처럼, 평등한 자에게 평등하게 보답받고, 불평등한 자에게 불평등의 보답을 받는 평등한 규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은 큰집단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의 배분에 대한 규칙은, 평등해야한다는 것이다.(선거권의 미성년자와 외국인 배제 등)

비례적 평등으로서, 예를 들면, 고소득자가 소수인 경우는 누진세를 부과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개인의 특성에 따라 타당성이 존재할 경우, 타당한 차이에 상응하는 배분의 규칙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평등은 대우에 정당화될 수 없거나 형평적이지 않은 불평등한 대우라지만, 그 대우가 정당화할 수 있거나 형평적이라면, 그 불평등할 대우를 평등한 것이라는 것이다.

절차적 평등으로서, 불평등하게 대우할 이유가 없는 한은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의 대상에 있어서는, 교육을 받을 기회의 보장, 선거권의 평등하게 보장되어 있는가의 선으로서의 평등이라는 것이다.

평등의 달성 방법으로서는, 최악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최상의 입장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다.

반대로 최상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최악의 입장 수준으로 내리는 것이다.

다음은 최악의 사람을 상향 조정하고, 최상의 사람을 하향 조정해서 그사이에 한 곳으로 맞추는 것이다.

 

 

 

 

13. 자유주의 의미와 원리

 

 

자유주의 의미는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하다는 근대사회사상으로서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사상이 아닌 시민사회의 시민정신이다.

자유주의 인간본성은 모든 인간은 사물에 대한 인식과 사고능력부족으로 도덕적인 면에서 과욕으로 인한 불안정하지만, 동물과 달리 이성과 양심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주의는 누구나 불안정하여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당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자유주의 기본원리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억압을 받을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신분, 인종, 종교, 성 등에 대한 개인의 인격과 인권은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법 앞에 평등하여 차별을 받지 않는 법치주의 기본사상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개인 누구나 평등하여 교육, 직업, 사회활동 등의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 모든 이간의 평등사상은 법과 제도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유주의 정신이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기본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연유는, 자유주의 기본입장은 개인주의로서 인간의 가치를 중요시 하므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협의개념이 아닌 개인의 생명권과 재산권 등 모두 포함하는 인권(human rights)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 중심주의 이지만, 이기주의(egoism)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개인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탐욕적인 욕심으로 타인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지만, 개인중심의 자유주의는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하여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완전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는 법과 제도적 범위에서 무제한의 자유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범위에 적용된다.

, 법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것은(Locke) 법치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자유주의 원리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 자신만의 책임과 권리로서 독립적인 자립정신이다. 또한, 경제상황에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경제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함은 자유주의 기본원리이다.

자유주의는 생각의 자유로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가지며, 이는 표현 및 비판의 자유와 더불어 언론 출판의 자유를 포함한다.

특히,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의 자유는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며,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에 기여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비판의 자유는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생각과 행동이 나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용(tolerance)이 있어야 한다.

문명사회에서는 건설적인 비판과 관용이 가능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유주의는 유럽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종교개혁과 시민혁명과정에서 종교와 정치의 자유 및 신분제도철폐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부르주아들 자신의 자유와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고,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적 평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통한 정치권력제한 등의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원리와 직결되었다.

서구의 정부들은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강력한 경제통제에 대한 철폐를 위한 경제활동의 자유를 주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가 생성되었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보장을 중시하는 사상이며,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평등, 개인 기본권보장, 사상과 비판의 자유 및 관용이 기본원리이다.또한, 정치적 자유주의는 보편타당성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계가 있다.

결국,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실천하기 위한 제도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개인 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통제의 관행을 버리고, 효율적인 자유 시장경제를 위하여 경제규제를 대폭적으로 축소하여야 한다.

 

 

 

 

14. 히틀러(Hitler)의 정치사상(나의 투쟁)

 

 

정치사상(나의 투쟁)

 

 

히틀러(Hitler)나의 투쟁은 뮌헨 봉기 이후, 란츠베르크의 요새 감옥에서 금고형을 살고 있으며, 1924년에 자서전을 구술필기로 시작하여, 옥중출판을 1925년부터 1927년에 걸쳐서 간행된 나치즘의 성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반 민주주의적, 독재적인 권력사상과 반유대주의적 세계관을 피력하였으며, 동유럽의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그 곳에 지배 민족인 게르만 인종의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종이란, 본질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어, 열등한 인종은 아무리 교육하고, 환경을 개선하여도 열악한 성격이 바뀌지 않으며, 우수한 인종도 생존권을 확보하지 않거나 열등한 인종과 혼혈하면, 몰락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세계관은 가장 우수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도태시켜 능력을 자유로이 발휘하여야 한다는 것과, 유태인이 독일 민족의 생존권을 좀 먹는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강한 능력이 있는 인간이 권력을 독점하여 저열한 대중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독재적인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인류문화를 진보시켜나갈 능력 있는 유일한 민족이 경제적 착취를 하고 있는 유태인을 말살하고, 열등한 민족인 슬라브 민족을 정복하여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정치사상을 가진 독재자인 것이다.

그의 사상은 미래를 위한 인간의 일이 크면 클수록 현대로서는 그 일을 이해하는 일이 더욱 곤란하고, 투쟁 또한, 어려우며 성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념 또한 최선의 이념이라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인양 자부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자신에게는 국가 사회주의자로서의 단 하나의 신조인 민족과 조국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투쟁 목적은 민족의 존립과 증식의 확보, 자손들의 부양, 단일 혈통의 유지, 조국의 자유와 독립에 있으며, 민족이 만물의 창조주에게 위탁받은 사명을 달성할 때까지 생육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병영의 작은 골방에서 노동자가 건너 준 소책자(나의 정치적 각성)를 읽고 감명을 받아 지저분한 식당의 가스등이 희미한 불빛아래서 독일 노동자당의 당원으로 등록하고, 번호 7번이라는 임시 당원증을 받았다.

그의 나의 투쟁은 연설의 규칙성과 통일성을 가하고, 당의 운동 원리를 추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집필되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최대의 정당으로 만든 것은 그의 뛰어난 웅변술로 선전활동에 활용하였기 때문이었다.

 

 

 

15. 스탈린(Stalin)의 정치사상

 

 

스탈린(Stalin)의 혁명적 사고력은 좌익반대파의 섬멸과 동시에 산업화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경제적 필요성보다 정치적 기회주의를 우선시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1927년 말에 가격정책의 오류와 산업에 대한 불균형 투자로 농민들의 농작물을 국가에 판매할 동기가 악화되자 국가전체경제의 균형이 무너져 내렸었다.

그는 극단적인 정책을 도입할 정치적 계산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경제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 정치적으로 정해진 틀에 경제를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파괴적인 과격성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온건파를 약화시키면서, 극단적인 정책을 통해 급진적으로 동원하는 레닌의 혁명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의 분파적 승리의 요인은 정적들의 실책도 있었지만, 다년간 권력 투쟁의 풍부한 경험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잠재적 지지자나 부동층을 합리적으로 포섭하고, 반대파에게는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였다.

그의 분파의 승리의 결과는 대약진 정책으로 계급전쟁과 혁명정신을 경제영역에 주입시켜 산업계획이나 제조업에 대한 자본투자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한계가 없었다.

산업에 필요한 투자는 얼마든지 확장하여, 서구의 장비를 대규모로 수입하고, 심지어는 공장전체를 매입하여 자원들을 신속한 작동으로 대량의 상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그의 약진은 전체 국민의 생활수준의 저하와 농촌농민들의 고통은 심화되어 농촌이 나라의 근간이 아니라 정복하여 착취를 하여야 할 식민지 취급을 당했다.

그러므로 해서 농민들의 경제적 동기를 박탈당하여 매년 생산량의 급속히 하락을 하자, 곡물징수에 무자비한 방식으로 조치를 하게 되자 정치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여 정치적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파와 정치투쟁을 하면서, 다양한 극좌파적 파괴적 정책에 대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치면서 지위를 상승시켜나갔다.

그의 정책의 변화는 농민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은 국가가 경영하는 농기업체의 노동자로 바뀌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의 정책의 변화는 집단화방식은 대규모의 농민을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동시키는 것을 전국에 걸쳐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권자에 오른 이후에도 붉은 군대의 승리로 히틀러를 굴복시키고, 일본과 개전함에 있어서, 미국과 소련의 장기적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대일전에 원조를 받은 기대를 하였다.

그의 많은 정치적 전략은 실제 또는 상상의 부역자에 대한 보복은 양날의 칼이었으며, 전쟁에서 극단적 폭력을 겪은 부역자에 대한 복수욕으로 군의 만행을 낳도록 하였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책임과 공감, 품위를 얻는 반면에 범죄와 원한이 쌓이는 것으로 공존하였다.

전체주의 정권이 그렇듯이 그의 독재체제는 사회를 동원상태로 유지하면서, 외부의적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고, 국내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을 딴 곳으로 돌림으로써, 정치목적을 이루는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반유대주의의 확산으로 유대인이 사회적으로 낙인찍기에 가장 편리한 표적이 되도록 하였다.

그의 정치권력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정점에 있을 때에는 권력을 향한 정치투쟁은 멈추지 않았으며, 부하들도 그다지 신뢰를 하지 않고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권력투쟁의 중요한 변수는 건강악화였지만, 부하들에게 권한을 나누어 주어 업무량을 줄이거나 직무를 포기하지 않고, 통제의 고삐를 한 번도 놓지 않고 비밀경찰기관을 이용하였다.

그는 레닌과 마찬가지로 자기 후계자를 지명하거나 평화로운 권력승계를 위한 법률적 메커니즘을 마련해 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의 출현을 저지하고 정치적 무자격자인 자신의 동료를 주입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195332일 소련공산당 당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의 공식회의가 스탈린의 병세악화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과거의 정치국이란 집단체제의 복귀상태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각료회의 의장직위를 말렌코프가 맡았으나 후계자로 승인을 받지 못하고, 당중앙위원회의 총 간사직위를 흐루쇼프가 되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공산당 통제위원, 소비에트연방총리, 소련공산당서기장을 했던 소련 최고 권력의 독재자인 스탈린은 195335일 딸 스베틀라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함으로써, 독재자의 꿈은 허망하게 사라졌다.

 

 

 

 

16. 모택동의 정치사상

 

 

 

1. 젊은 시절

 

 

모택동은 중국남부에 위치한 허난성 샹탄현 샤오산에서 18931226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2년 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한자를 읽었으며, 부친은 빈농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해서 부자소리를 들었으나, 모친은 친절하고 너그러우면서 동정심이 많아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나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여 적대감을 느끼는 반항심이 많은 아이로 성장하였다.

이런 그를 보고 부친은 언제나 게으로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을 함으로써,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항아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부터 반항심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그는 나이 9세부터 아버지의 지시에 의하여 일하면서, 사숙의 지도하에 논어, 맹자, 대학,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등을 비롯하여 세계의 영웅전을 비롯하여 여사지리 등을 섭렵하였다.

1907년 이웃마을 부모가 정해준 4살 연상인 나일수와 결혼을 하였으나, 신부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직 수많은 책을 독파하면서, 사서삼경, 수호전, 삼국연의, 서유기 등을 외우는 정도로 읽어서 누구와의 대화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의 독서법은 세 번 반복하여 읽고, 네 번을 익히라는 삼복사온(三復四溫)의 독서법으로서, 붓을 움직이라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은, 내용에 대한 요점을 정리하고,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곳에 표기를 하면서, 주를 달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독서는 읽기의 진도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했으며, 책의 내용이 잘 못된 것을 바로 잡았으며,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여, 많이 물으라는 사다(四多) 공부법을 실천했었다.

그는 14, 15세 때에 정관응이 지은 성세위언(盛世危言)”을 읽고 낡은 중국과 다른 새로운 중국이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09년 그는 15세 때에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25키로나 떨어진 동산국민학교에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 입학을 할러고 하였으나, 나이가 많다고 거절을 당하자 간절히 애원한 덕분에 임시학생의 자격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학교에 임시 입학한 그는 수호지와 삼국지만 가지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교에 다니던 중에 담임선생과 교장과의 삼국지 정사(正史)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그가 교장의 배척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여 퇴교처분을 당하였다.

191118세 때에 동산국민학교에 퇴교당한 그는 창사의 상향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신문에 실린 반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1010일 청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태인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후난성에 계엄이 선포되고 창사에도 무장봉기가 일어나 청 왕조에 대한 독립을 선포되었다.

그는 창사의 무장봉기군의 일원으로 여원홍의 혁명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하다가 혁명이 마무리되어 제대한 후에는 공립 고급상업학교인 제1중학에 입학을 했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스스로 공부계획을 세우고 후난성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국부론, 법의 정신, 민약론, 진화론, 논리학 등을 독서하면서, 당시 강대국인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역사서적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작품을 읽었다.

1913년 그는 20세가 되어서 본격적인 배움의 길로 들어서면서, 시인이며 문필가의 평을 받을 경지에 들어섰으며, 그는 1914년 정부에 의해 그는 제1사범학교 예과 제3반에 편입되었고, 가을에 본과 8반에 되었다.

그는 영어, 수학, 자연과학은 관심이 없었으며, 글쓰기, 작문을 좋아하여 도서관에 묻혀 살았으며, 그의 필명이 성명획수를 암시하는 이십 팔 획 생이었다.

191841424세 때에는 10여명의 동지들과 구국구민을 위한 단체 신민학회를 만들어서 회원을 70~80명을 확보하여, 학회의 목적은 학술을 혁신하고 품행을 닦고, 민심과 풍속을 개량하는데 두었다.

19186월 그는 후난제일사범학교를 5년 만에 졸업을 하자마자, 베이징 양창지 교수로부터 프랑스의 유학기회의 서신을 받았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포기를 하고, 신청년회의 민립보를 통한 혁명가의 길로 가게 되었다.

1918815일 그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베이징대학 양창지 교수가 있는 베이징으로 가서 교수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 도서관의 사서보조원 자리로 들어갔다.

그는 7개월 동안 베이징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스승 양창지 교수의 병문안을 자주 가다가 교수의 딸인 양개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5.4운동(러시아혁명 3.1운동)의 확산으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 베이징 각 대학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616일 전국학생연합회가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그는 궐기에 주도하면서, “상강평론편집장을 하면서, “민중대연합이라는 글을 실어 명성을 얻었다.

스승인 양창지 교수가 1920117일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의 딸과 결혼을 하여 침수이탕이란 연못 근처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세 아들을 낳았으며, 아내는 자식들을 양육하면서 생활하고, 그는 밖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201월 그는 처음으로 노동자들로 정치조직을 만들면서,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으며, 그는 192212월경에 후난성 노동운동이 최고로 오를 때에 가족들과 동참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투쟁에 두려움을 느낀 지주계급들은 후난성 지배자인 조항척에게 그를 제거해달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조항척의 긴급명령으로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 모든 사실은 알아버린 그는 광저우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왕징웨이와 연락하여 선전부장을 하였다.

1926년 그는 장개석이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하자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갔다가서, 192714일부터 그는 후난성 외 5개현의 농민조직과 정치상황을 조사하여 중앙위원회 제출하면서 농민정책을 추구하였다.

1927326일 장개석이 무혈 진입하여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으면서, 공산당원이나 동지들을 학살하면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노동조합과 공산당원, 지식과 학생들의 조직, 농민조직을 해체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 조직이나 노동조합, 농민조직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극소수만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중국 전역에 혼란에 빠지고, 공산당의 적색테러와 국민당의 백색테러가 사회를 혼란 시켰다.

192781일 장개석의 공격에 반격에 나선 공산당은 최초로 군대인 홍군을 약 2만 여명을 조직하여 광저우에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는 창사로 돌아와서 후난성 공산당의 새로운 농민, 노동자혁명군 조직을 만들면서, 대지주, .소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권력기반을 후난에 구축하는 소비에트조직의 하나로서 목표를 세웠다.

그가 이끄는 홍군 저항에 국민당 사령관이 가족들을 체포령을 내려 체포한 후 사형을 집행하자 그는 심리적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182710월 그는 훈련도 안 된 홍군이 패배하면서 이동하는 동안에 국민당의 민병대에 붙잡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산악지대인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후난성 농민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던 연유는 농민혁명군은 너무나 약체였던 것이었다.

1927년에서 1934년 대장정에 오르기까지 모택동은 징강산과 장사에서 새로운 전략의 혁명투쟁을 위한 정치적 사상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2. 홍군의 대장정(大長征)

 

 

모택동은 징강 산에서 부대를 지원병으로 구성하고, 이들이 농민과 민간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운영방침을 세운 것이, 중국 공산당 군대인 홍군, 팔로군, 신사군, 인민해방군의 원칙이 되었다.

징강 산에서 그의 활약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인물들이 합류하여, 1928년 에 홍군은 5군으로 편성하여 3년 동안 존재하면서, 홍군의 활동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농민에 대한 토지무상 재 배분정책과 규율로 농민들에게 호응을 받아 사기가 높아지면서, 국민당 군대(백군)의 초 공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장개석의 초공작전이 1차로 1930년 말로 10만 명의 국민당 백군의 공격을 모두 5차래나 공격하였으나, 홍군이 3차래나 승리를 함으로써, 19311211일 제1차 소비에트대회에서 주석과 중앙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고, 지방과 도시를 공격하여 홍군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키워나갔다.

19334월 장개석은 4차 초공 전에서 자기 생애의 최대의 치욕을 격은 패배를 하자, 19339월 장개석은 다시 100만 명의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5차 초공 전을 벌렸다.

홍군은 기존의 모택동의 전술인 상대를 먼저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버리고, 현 위치만 사수함으로써, 전투에서 패배를 하여 훗날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대장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41017일 공산당은 약 86천여 명의 홍군과 중앙 정부와 공산당 요원이 장시성 남부의 위두에 집결하여 루진에서 목적지인 연안을 향한 장도의 길에 올랐다.

공산당이 장정(長征)에 오르면서, 국민당측이 알았을 경우에는 홍군이 벌써 빠져나가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징강 산과 루이진의 근거지를 86천여 명이 탈출하였으나, 상강의 도하전투에서 패배로 홍군이 3만여 명의 남을 정도로 수많은 희생을 가져왔다.

상강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19341212일 정치국 긴급회의에서 모택동은 후난 서북쪽으로 가는 중앙당의 원래 계획을 반대하면서, 귀주성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다.

홍군은 기만적인 기동작전으로 낮에는 쉬고 밤에는 행군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국민당의 비행기가 홍군의 주력부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 강행하였다.

리평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홍군은 오강을 도강하여, 193517일 구이저우 북쪽의 주요 도시인 쭌이를 점령하였다.

홍군은 쭌이를 점령한 후, 모택동은 1935115일부터 17일까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중앙정부집행위원으로 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국민당 제5차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 전술이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을 택한 것과 탈출과정도 전략적 후퇴가 아닌 맹목적 도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히 비판을 했었다.

회의 결과는 당 중앙위원회는 보구의 총서기직과 리더(오토 브라운)의 군사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고, 모택동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대장정 중에 당과 군대의 지도적 지휘가 확립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확립되었다.

그 후, 홍군을 지휘하는 모택동은 구이양에서 20리 떨어진 비행장을 점령을 하였으나, 여려 차래 국민당 군과의 혼전을 거듭하면서, 100키로 이상을 행군하는 가운데도 대열을 정비하여, 금사강을 도하작전으로 국민당 군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후에 루딩교를 건넜다.

홍군의 대장정은 국민당 군의 추격으로 인한 전투와 도주의 연속은 설산과 습지 등 대자연을 극복하는 고난의 행군이 되었다.

모택동은 홍군과 같이 새하얀 눈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발 5,500미터의 쿤룬산맥을 정신력으로 넘으면서, 보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쿤룬을 세 토막 내어 유럽, 미국, 동방에 보내겠다는 영웅다운 강인한 자신감으로 소리를 쳤다.

홍군은 죽음의 늪을 지나고 험한 협곡과 산맥을 넘어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어가며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19351019일 중앙 홍군을 이끌고 더디어 산시성 바오안현의 좁은 산골짝에 있는 우치진에 도착한 모택동은 가슴 벅찬 목소리로 장정은 승리했다.”고 선언을 하였다.

모택동과 홍군의 대장정은 장시성 위두를 출발한지 367일 째로서, 행군의 거리는 약 15천키로 미터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홍군은 11개의 성을 통과하고, 18개의 산맥과 24개의 큰 강을 건너서 죽음의 습지를 건고 행군한 것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대장정은 깜깜한 어둠에 쌓여 있던 중국에게는 아침햇살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 무렵 모택동은 1년 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대항하는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인민이 단결을 하여 항일정책을 주장하자, 지식인과 학생들 중심으로 열풍이 고조되었으며, 공산당은 언론을 통하여 항일민족통일 전선공작이란 선전공작을 확산시켜나갔다.

반면, 장개석은 만주를 침략한 일본보다 장시성에 있는 홍군을 먼저 공격할러는 정책을 씀으로써, 만주지역의 병권을 쥐고 있던 장학량은 일본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말라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공산당은 장학량에게 항일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것은, 장정을 통한 열악한 근거지를 회복키 위한 시간이 필요했으며, 장학량 입장에서는 홍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 패하여 공산당 전투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부친 장작림이 열차에서 일본군에 의해 폭살 당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오른 처지에 놓여있었다.

193649일 공산당 제안에 동조한 장학량은 장개석 몰래 이극농의 주선으로 천주교 교회당에서 이튿날을 새벽까지 철야 회담으로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암묵적으로 합의를 하였다.

1936129일 전국적인 항일반대 시위가 베이징에서 일어난 1주년 기념하기 위하여 1만여 명 학생들이 시안 역에서 내전종식과 대일항전에 대한 기습시위가 일어났다.

 

 

3. 국공합작

 

 

중국의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19361212일 국민당 부사령관인 장학량이 홍군과의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방문한 장개석을 납치.구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모택동은 이 사건으로 장개석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지만, 중공지도부와의 논의 끝에 평화적으로 처리하기로 당론을 모았으며, 1215일 연명으로 시안사변에 대한 국민당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장학량이 제기한 8개 주장을 지지하였다.

장학량은 포로가 된 장개석 신변처리에 골몰하고 있던 중에도, 장개석에게 내전종식과 항일을 권유했지만, 오히려 심한 핀잔만 들었다.

지역 국민당 사령관이 항명으로 총사령관인 장개석의 구금소식은 온 중국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과 오빠인 송자문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앞장서 나섰다.

장개석은 자신이 조심하지 않아 뜻밖의 재난을 당한다며, 3통의 유서까지 쓰서 아내와 국민들에 보냈다.

유서에는 한 번 죽음으로써 국민당과 국가, 인민에게 보답하고, 혁명 당원에게 부끄럽지 않기 바라며, 중화민족은 부흥의 날이 온다.”로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결연한 유서였다.

결국, 장개석은 내전을 멈추고 항일을 해야 된다는 도널드와 장학량의 설득에도 듣지 않다가 같이 구금된 천청 등 국민당 군 장군들의 건의를 받아들어 협상하기로 하였다.

중공 중앙지도부의 강경파는, 이 번 기회에 철천지원수인 장개석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실리 파는 소련의 의견을 확인하고, 평화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논쟁이 이어졌다.

소련의 스탈린은 장개석은 중국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처형되면, 중국이 분열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안전하게 풀려나오도록 명령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러한 연유는 시안사건 한 달 전에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삼국이 동맹을 맺었으므로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중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만 했었다.

1217일 저우 등 중공 중앙의 대표자들은 장학량이 보낸 전용기를 타고 시안에 도착하여 사태해결을 위한 토론을 하면서, 장개석을 살리면서, 내전을 피하고 국공이 힘을 합쳐 항일에 나선다는 합의를 많은 시간 끝에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을 두려워하는 장개석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항일을 명분으로 하여 성사가 된 것이었다.

회담이 성사되자 성탄절 전날 밤에 저우는 장개석을 만나려 간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각별한 인연은 10여 년 전 황푸군관학교에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을 때에 저우는 정치부주임이었다.

장개석은 저우를 보며 더 이상 내전은 안 된다며, 우리 적이지만, 항상 저우를 생각했다고 하자, 저우는 공산당원들도 중국의 항일영도자로 지지한다고 화답하였다.

1225일 풀러난 장개석은 시안사변의 주동자인 장학량을 대동하여 난징으로 돌아가는데, 저우는 장학량을 보고 난징에 가면 필히 장개석에게 보복을 당한다고 극구 말렸다.

장학량은 사변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항명한 군인으로서 당당하게 처벌을 받겠다며, 체면을 내세워 난징으로 갔다.

결국, 장학량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형의 선고를 받고 사면조치가 되었으나, 평생을 가택연금 상태에서 53년 동안 지내다가 하와이에서 노한으로 103세에 사망을 하였다.

장개석은 합의 문서에 구두 상으로 약속하면서,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았으며, 중국을 대표하는 총통의 위상을 갖추었다.

시안사변 직후, 19377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이득을 보면서, 가장 척박한 산시성 옌안의 황토고원에서 홍군의 강한 근거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군사역량을 강화하며 발전시켜, 모택동의 당내입지가 더욱 강화 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서한을 발표하고, 보증을 요구한 내용은 내전중지와 일치항일,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보장과 정치범석방, 모든 당파와 군대의 대표자회의소집과 공동구국의 실현, 대일항전준비, 공작의 신속한 완성, 인민생활의 개선 등 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다면,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무장폭동중지, 소비에트 자치정부의 명칭을 중화민국 특구로 개칭하며, 홍군도 국민혁명군의 편제에 따르겠으며, 민주제도를 실시하고 지주의 토지몰수를 중단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중일전쟁의 계기로 신속히 협의되어, 922일 국민당 중앙당 중아통신은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고 선포하고, 장개석은 23일 담화를 내고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였다.

2차 국공합작의 협약에 따라 공산당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불리는 항일부대로 편성하여 국민당 군대와 공동전선을 펼치며 항일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국공합작으로 군부대 재편성뿐만 아니라 행정구역도 협의를 모아서 소비에트 자치지역을 특별구로 지정받고 두 개의 변구를 운영하게 되었다.

항일에 대한 열망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물론, 중국인민, 노동자, 학생 등 전 계층에서 일치단결로 뭉치게 되어 대일항전이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193789일 일본해병대 중위와 사병이 상하이 홍차오 비행장으로 난입하다가 중국군 수비대에 사살되는 사건으로 중일 양국의 상하이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단호한 조치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선언하고, 육상전투기로 외국인의 조계지를 제외하고 시내 곳곳에 무차별 폭격을 하였다.

상하이를 수비하던 국민정부군은 최정예부대와 중국공군 전투기로 일본 육상전투기를 격추시켜 위용을 떨치자,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군사적 요충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육탄전을 벌이면서, 쌍방이 진지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고지 전을 벌린 전투가 되었다.

일본군은 계속 증원 군을 요청하여 전세가 유리한 방향으로 가자 장개석은 총사령관을 맡아 상하이 전투를 진두지휘를 하였으나 양국 모두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전면전을 벌렸다.

이런 연유는 선전포고를 하면, 미국의 중립법(Neutrality Act)적용을 받아서, 선전포고를 하는 교전국에는 경제제재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1941년에 국제여론, 무기거래, 중립국 조계지 및 자국교민 등의 요인으로 정식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국군은 1026일 대창전투에서 결사항전으로 싸웠으나 실패하여 일본군을 막기는 역부족이 되자, 19371111일 상하이가 함락되었으며, 국민당 정부는 임시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19371213일 무주공산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살육하고, 6주간의 짧은 기간에 약 30만 여명 난징대학살사건이라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더욱이 여성들이 강간피해를 입은 여성은 수만 명이었고, 건물은 80%가 넘게 파괴되거나 불타버렸다.

공산당의 팔로군이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값진 첫 승리를 한 것은 일본군 5사단 1,000여 명을 전멸시키고 탄약과 무기를 대량 획득한 것이며, 팔로군의 전술은 산간 유격전 위주로 치고 빠지며, 일본군에 기습 공격하는 전투를 하여 승리를 한 것이었다.

모택동의 전술은 팔로군 병력을 투입하는 전투는 자신의 동의 없이 싸움에서 승리를 해도 질책하면서, 마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기보다 팔로군의 전력을 최대한 확장하고 보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공산당 세력이 급속도로 평창하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다가 급습을 당해 중과부족으로 겨우 몇 천 명이 살아나서 도주하는 상항이 벌어졌다.

공산당 중앙이 주체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항일 통일전선 요구에 발맞추어 공농공화국을 인민공화국을 바꾸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는 정책을 확정하였다.

당 중앙과 홍군은 1937년 산시성 연안에서 혁명군 근거지를 구축하였으며, 모택동은 마을 서쪽 펑황산 기슭에 야오동이라 불리는 토굴집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모택동은 여기에서 서양 춤을 가르치는 스메들리와 배우활동을 하는 리리우와 가까이 하며 사귀었어나 옌안에 나쁜 소문이 나자 허쯔전과 이혼을 결정하고 당 중앙에 처리를 요청하였다.

때마침, 77일 항일전쟁사건이 터지자 연안은 전시상태가 되어 당 중앙은 신속하게 이혼을 승인하였다.

모택동은 좋아했던 여성들과 허쯔전을 보내고 난 뒤에 193811월에 연극배우인 강청과 결혼을 하였다.

당 중앙과 홍군이 들어와 근거지가 안착되면서, 연안은 꿈과 희망의 도시로 변해갔으며, 중앙당교, 항일군사 정치대학, 예술학원, 청년훈련반, 교육, 선전, 출판, 여성문제 등 각 분야에서 세력이 확장되었다.

193869일 장개석은 일본군이 우한의 북쪽으로 공격해오자, 이를 막기 위해 항하제방을 폭파함으로써, 물이 범람하여 많은 중국 인민들만 대재앙을 겪게 되었다.

장개석은 우한이 점령된 직후에도 방어 전략을 펼쳤으나 전세가 악화되자 땅을 태워 항전하는 전략으로 창사 대화재를 일으켜 5일 동안 화재로 많은 인명사상과 가옥이 불타버렸다.

일본군은 우한 점령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병력, 전투물자를 전력을 다해 쏟아 부어서 광우저와 우한을 점령하였으며, 19392월 중국 최남단의 휴양도시 하이난과 동남부의 주요도시를 거의 점령을 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의 넓은 지역을 관리하면서, 전투를 해야 하므로 점점 더 곤경에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모택동은 19415월 고위간부회의에서 학풍과 당의 기풍을 바로 잡자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중국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 형식주의, 기강을 바로잡는 연설을 하면서, 1942년부터 1945년 봄까지 3년을 학풍, 당풍, 문풍이라는 3풍을 목표로 본격적인 정풍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3월 모택동은 정치국과 중앙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어 당정군의 중국공산당의 최종결정권자가 됨으로써, 중국공산당 정책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유기소는 모택동의 사상과 사상체계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으며, 모택동의 혁명적 사상은 실천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군사상 발전을 위한 논리이자 행동지침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신민주주주의 혁명, 항일전쟁, 국공내전 승리, 중화인민국 수립이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와 혁명의 주체는 도시노동자가 아닌 농촌농민이라고 했었다.

 

 

4. 천하통일

 

 

모택동의 정치사상은 신민주주의 혁명정신으로 국공내전의 승리를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1945423일부터 611이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에서 모택동의 기치아래 승리를 위한 전진 슬로건을 내걸고 당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이 대회에서 모택동의 사상이 당의 헌장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최고 규범인 당장에 공식적으로 들어갔다.

이 당장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으로 들어 간 것이며, 공산주의가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모택동의 사상으로 지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전시물자보급에 곤란을 격자 섬유와 고무, 주석, 쌀 등이 풍부한 동남아 지역을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19409월 독일, 이탈리아 3국 동맹을 맺고, 프랑스령인 하노이를 점령하고 다시 네덜란드령인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독일에 패한 프랑스는 힘쓸 수 없게 되자, 미국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에서 철저히 중립을 표방하고 관망을 하였으나, 일본이 우방의 통치구역에 들어오자 위협을 느끼게 되어 중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일본을 수출허가제로 전환하였다.

미국과 서방세계가 일본에 압박을 가하자, 일본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1941127일 일요일인 휴일 날에 전투폭격기와 항공모함으로 공격을 하였다.

다음날 미국의회는 선전포고를 하고 진주만을 기억하라.”라는 구호로 단결한 태평양전쟁은 일본을 패망시키게 된 원인이 되었다.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태평양전선과 중국내륙전투에서도 패하면서, 종전 막바지에서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파쇼동맹이 연합군에게 밀리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승리가 예상되는 속에서 세계질서재편을 위한 카이로 회담이 추진되었으며, 19452월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흑해 연안의 알타에서 알타 회담을 개최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에 19457월에 독일의 포츠담에서 연합국 수뇌부가 포츠담 회담을 개최하였다.

중국은 8년간을 항일 전쟁으로 국민당 주력군은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다가 심각한 손실을 입으며 종전을 맞이하였지만, 공산당은 서북지역에 위치하여 항전 기간 중에도 해방구 지역을 확장하고 전투력을 보전하였다.

1945610일 모택동은 7차당대회에서 중국혁명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동북지방이 특히 중요하므로, 현재의 근거지를 모두 잃더라도 동북지방만 가지고 중국혁명을 튼튼한 기초를 보유하여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모택동은 동북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북부를 확대하고, 남부를 방어한다는 전략방침을 확정하였다.

중국공산당으로서는 동북지역 확장이 절대적 필요했으며, 홍군이 먼저 동북지역의 농촌 및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소련이 주둔하고 있는 동북에서 군수물자, 산업시설, 일본에게 노획한 대량의 무기를 넘겨받았다.

소련은 동북지역의 국민당이 장악하거나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으로서는 행운이 따라와서 만주지역까지 장악할 수가 있었다.

종전 무렵 국공양당 대립이 동북지역을 시작으로 노골화되자, 미국은 중국 내전을 피하기 위하여 쌍방의 담판을 적극적으로 주선을 하게 되었다.

장개석은 충칭회담을 제의하면서, 미국, 소련, 영국에 여론전을 펼치면서, 자신만이 해방 후, 평화를 수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소련은 장개석을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하는 조약을 국민당과 맺게 되자, 소련의 지원을 꾸준히 받아 온, 공산당은 내심 불안하게 되자, 모택동은 협상에 임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서북 옌안 근거지인 중국 중앙에 유소기 중심으로 5인의 서기 처를 운영토록 하였다.

1945829일 충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이 43일간 단독회담을 하면서, 모택동은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현재의 모든 법령을 폐지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등의 8가지 원칙의 요구사항을 내 놓았다.

협상은 10차 걸쳐 진행되어 우여곡절 끝에 합의문에 서명을 하고 신해혁명 기념일인 1010일 발표하고, “충칭 담판으로서 중국 전역에 선포를 하였다.

194535일 모택동은 공산당의 군대를 중국인민 해방군으로 공식 선포하여 군대를 재편하여 공산당 중앙소속의 당군으로 통합하여 지방정권이 아닌 국민당 정권과 대등한 입장에서 겨뤄보기로 하였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군이 공산당군보다 병력, 장비, 보급이 모든 면에서 우세하였던 것은, 일본군의 장비접수와 미국의 방대한 전쟁무기와 보급물자를 지원받았기 때문이었다.

19463년 동안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지치게 만들었고, 국민당 정부는 인민들의 경제적으로 생활을 힘들게 만들었으며, 미국의 많은 지원물품과 여러 가지 이권을 착취하는 지방 군벌들은 너무나 부패하였다.

장개석은 동북전역과 하이 하이 전투에서 무너져서 결정저인 타격을 입게 되자, 1049121인 영욕의 세월을 뒤로하고 총통의 자리에서 하야를 하자 뒤를 광시의 군벌 부총통 리쭝런이 뒤를 이어 대리 총통이 되었다.

장개석은 표면적으로는 총통자리에서 물려났지만, 실질적으로 국민당 정부를 움직이는 위치에 있었으나, 난징에서 리쭝런은 모택동과 공산당이 제시한 국민당 항복 8가지 원칙인 평화협상안의 동의하였다.

모택동은 국공내전에서 초반은 불리했으나, 인민들에게 지지를 얻으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미국 기자에게 모든 반동파는 종이 호랑이며, 장개석과 그의 지지자인 미국의 반동파도 종이 호랑이다.”라고 했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사상은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키는 청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의 해방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항우저와 우환을 해방시키는 가운데 국민당의 군을 황인보는 20만 명의 잔류부대만을 이끌고 상하이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해방군의 총공격에 6개월을 방어하던 황인보는 버티다가 결국, 바닷길로 5만 명을 데리고 도주를 하자 나머지 국민당 군은 투항하거나 섬멸되었다.

모택동이 신 중국건국을 선언할 때에 남부에서 도망을 다니는 비참한 처지가 된, 장개석은 19491210일 청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본토를 떠나 타이완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1949921일 베이징에서 제1차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성대하게 소집한 자리에서 모택동은 최종적인 승리를 예감하고 개막사를 통해 중국인민은 일어섰다,”는 명연설을 하였다.

1949101일 자금성 텐안문 성루에 우뚝 선 모택동은 운집한 30만 인민과 전 세계를 향해 새로운 중국의 출발을 선언하는 연설을 하였다.

동료 여러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는 오늘 성립했습니다.”라는 가슴 벅차오른 감격의 연설로 중국을 천하통일 한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17. 마르크스(K. Marx)의 정치사상

 

 

 

사상적 특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분야에서 관념론을 억설이라고 배척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채택을 하였다.

이 주의는 존재가 사유를 규정하고, 자연이 정신을 규정한다고 보았으며, 세계사의 파악을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존립을 부정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생성유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였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사회의 역사파악에 적용하여 유물사관의 정식을 확립하였다.

이 주의는 인간사회의 모든 발전 형태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생산제 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데 두었으며, 경제학설의 특징은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모든 사회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자본주의사회 아래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서와 고도의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실현과 유물론을 강조하였다.

 

 

3. 유물사관

 

 

유물사관은 인간사회의 역사에 적용되는 유물변증법이라고 하였으며, 유물사관은 생산 그리고 생산물의 교환이 모든 사회에서 생산물의 분배 및 이에 수반하는 사회의 계급적 또는 신분적 구성은 어떻게 생산되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명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변경 및 정치적 혁명의 원인은 진리나 정의를 인간의 통찰 증진에 구할 것이 아니라 생산방법이나 교환방법의 변동에서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은 자유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적인 생산양식은 생산수단이 사회공동 소유로 이행되어 생산자의 공동이용과 계획적 관리에 위임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물사관은 사회형태의 발전 기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와의 모순에서 구하므로 생산력이 발전단계에서 속박 당할 때에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통하여 사회제도의 왜곡을 파괴하고 보다 높은 사회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유물사관은 혁명일반의 학설과도 직결되는 역사관이라고 하였다.

 

 

4. 계급투쟁

 

 

공산당 선언에서는 종래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역사라고 했었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조합의 두목과 공장(工匠)처럼 억압자와 피억압자와의 대립으로 끊임없는 싸움은 전사회의 혁명적 개조로 끝내거나 싸우는 계급의 공통적 몰락으로 끝난다고 했었다.

근대 시민사회는 두 개의 적대진영이 직접 대립하는 두 가지의 계급으로 분별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유물사관에 의한 계급투쟁이라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로부터 모든 자본을 억지로 빼앗아, 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생산도구를 집중시켜 생산력의 총량을 급속히 증대시킬 것이라고 했었다.

 

 

5. 정당론

 

 

마르크스는 정당의 본질을 계급투쟁의 조직으로 보고, 계급은 통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경제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생산에 있어서도 공통적 지위, 분배에 있어서도 공통적 지위에 의하여 결합된 집단으로, 공통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인류의 하나의 집단으로 의미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계급정당에 대립하는 특수한 정당을 형성하지 않으므로 공산주의 정당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6. 마르크스주의 비판

 

 

1) 계급투쟁론 비판

 

계급투쟁론은 무자비한 계급투쟁으로서 일종의 선동 론으로서, 역사상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계급투쟁론은 중간계급의 존재를 너무 무시한 이론으로서, 사회공동이익, 국민이익을 등한시 하였다.

 

2) 정당론 비판

 

정당은 계급분류에 따라 성립되는 정치집단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민족적 이해는 계급적 이해보다 우선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계급정당론은 정당의 3차원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며, 계급의 현대적 개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당의 당원을 공모를 하지 않고 사고력, 판단력이 성숙하지 못한 청소년 당원확대는 정당의 변질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회경제이론 비판

 

자본주의 발전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양극화가 된다지만, 자본주의 발전은 중산계급의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합의 조직화가 진전되면, 부르주아의 일방적인 착취가 없다지만, 협동조직은 국내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선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발달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선거권이 부여되어 노동자 계층의 지위향상과 정치활동을 할 수 있어, 의회주의 발전과 사회주의 정당의 발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유물사관 비판

 

유물사관의 주장은 역사적 순서가 마르크스 사후에도 현대까지 그 사관의 공식대로 실현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의 세력이 없으며, 자본주의 발달이 낮았던 러시아에서는 실천이 있었으나, 오늘 날은 중간 계급이 결여되고 있는 빈곤한 후진국가에는 마르크스주의는 위협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사관의 순서에 의하면, 자본주의 붕괴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태아가 성장한다고 하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체계의 실패는 서구에는 공업실질임금이 상승하게 되고, 서구의 노동계급은 개량주의적 개선을 받아드리게 되고, 노동계급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조건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18. 레닌(Lenin)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레닌(Lenin)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볼셰비키(구소련 공산당)라는 공산주의 분파를 창설하여 당으로 성장시켰으며, 191710월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선포되었다.

레닌과 공산주의 지도부는 러시아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시켜 내전에서 승리를 하였으며, 그는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에는 문제 거리였지만, 세계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대해서 그의 해석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경전이 됨으로써, 사후에도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명명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 모델은 동유럽, 중국, 동남아시아, 카리브 해, 아프리카 일부지역까지 전파되었으며, 공산주의 체제의 발전과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공산주의는 1989년에 동유럽, 1991년 말에 소련이 해체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 혁명을 요구하는 지식인 중에 한 명으로서 정치, 경제구조와 사회적 위계도 불쾌하고 역겨워하면서, 로마노프 왕조와 구 러시아를 증오했으며, 새로운 러시아, 유럽 국가로서 러시아, 서구화된 러시아를 원하고 꿈꾸었다.

그는 독일에 대하여 찬탄하였으며, 독일 마르크스주의 운동, 당대의 독일 산업과 기술을 찬양하였으며, 서구로 변화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계몽주의, 진보, 과학, 혁명을 빌었으며, 이 모든 경우에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사상이 올바르다는 확신에 흔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지식인과 노동자들과 여러 사회집단들이 체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치적 긴장, 행정의 취약, 민족적, 사회적 분열, 폭력적 정치문화 등,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도와주는 환경으로 조성되었다.

그에게 영향력을 준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만이 아니라 19세기 말 러시아 농업사회주의 테러리스트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10월 혁명,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신경제 정책 등의 논란을 즐겼으며, 볼셰비키 당내의 모든 분파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가부장적 리더십은 지배력이 매우 강력하였다.

1917“4월 테제에서 그는 당의 권력 장악 전략을 기초를 하였으며, 19183월 그는 브레스트리 톱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러시아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1921년 그는 신경제 정책을 도입해서 인민반란으로 소비에트 국가가 궤멸하는 것을 막았으며, 그의 이런 전략적 변화를 이끌지 않았다면, 소련은 결코 건국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레닌은 볼셰비키 권력의 최고 정부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체카(비상위원회)를 창설하였으며, 그는 정치가로서의 정치사상을 가진 것을 만족하였으며, 자신의 교리와 당, 혁명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러한 레닌의 정치사상은자신의 국가와 전 세계의 극좌 사회주의에 영원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 넬슨 만델라(Mandela)의 정치사상

 

 

 

정치사상

 

 

넬슨 만델라의 어린 시절은 촌뜨기 소년시절부터 불굴의 정의감을 가진 아버지의 자부심을 가진 행동과 성격에 대한 자질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백인을 만나본 적은 없으나 신처럼 위대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기독교 학교에서 신에 복종하고, 정치적 권위를 존경하고, 교육의 기회를 베풀어준 정부나 교회에 감사하도록 배웠다.

그는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신이 아프리카 민주주의를 위한 앞으로 투쟁과정을 위해 자신이 사상적 무장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자본론 등의 전집을 구해 열심히 읽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조직과 인민의 이득에 앞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난을 하였다.

1952년 그는 비 백인으로서 법률상담소를 열었으며, 인종격리정책인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시설, 거주지 등에 흑인가 백인을 강제 분리하는 인종격리정책을 반대하는 흑인 인권운동을 하였다.

그는 인종차별 정책에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인하여 27년간 어두운 감방에서 보내면서, 공동체를 위한 아프리카 국민회의 최고 사령부를 섬에서 완성해나갔다.

그의 정치사상은 인류를 위한 평화, 민주 그리고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조직과 인민들이 주도하는 집단적인 저항만이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가족과 직업을 잃고 경제가 파탄 나고, 정치적 갈등을 격지만, 국민통합은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평화, 비폭력, 자유, 인간의 권리, 행동의 자유가 있어야 하며, 또한, 전쟁과 폭력, 인종주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빈곤이 없는 사회체제를 이루겠다는 정치사상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각자의 삶, 자유, 번영, 인간의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정부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몫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사회를 갈구하였다.

 

 

 

 

20. 니체(Nietzsche)철학사상

 

 

 

 

2. 철학 사상

 

 

 

니체의 젊은 시절에는 고전문헌 학자로서, 고대의 위대한 철학적 행위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쇼펜하우어의 체험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그는 언제나 문헌학자로 머무는 것을 불만을 품었으며, 자신이 언제나 저술가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전공과 달리 글쓰기와 철학공부에 열정을 받쳤으며, 자유 분망한 사유태도로 자기사유의 독보적 언어를 구조해 내려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통찰과 독특한 표현의 유착관계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자기 형성의 과정에 사상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는 문화의 유성이며, 특히, 그는 국가, 종교, 문화를 거대한 현실 권력을 동시에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중에서 문화를 가장 주요시 하면서, 모든 일은 문화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최상의 목표이며, 문화가 국가나 경제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문화에 대한 정의로서, 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최대 다수의 행복에 있는지, 아니면 개인적 삶의 성공에 있는지 선택하여야 하며, 최대 다수의 행복은 도덕적인 관점인 반면, 최고치에 도달한 성공한 개인의 문화의 의미는 심미적인 관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 인간의 존엄, 자유, 균형 잡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위대한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방해한다고 하였다.

, 빛나는 형상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와 더불어 신의 죽음 이후 아직 남아 있던 의미로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신화를 압축된 세계상이라고 묘사하면서, 이를 통해서 삶은 한 층 더 높은 의미를 가지지만, 신화는 개인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연관성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는 종교를 믿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합리적 이성이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화로 눈을 돌리는 것은, 신화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에 형상력에 강한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학문이 아니라 지혜였으나, 독일제국의 수립이 그의 모든 비관주의 철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는 역사주의가 지식과 인식으로 인한 생명력 마비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하였으며, 우리들의 삶의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상, 열정, 사랑에서 나오는 삶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영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였으며, 영감이 우리에게 고상하게 다가오는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더 근사하게 보이는 것이며, 우리의 허영심은 천재와 영감의 숭배를 촉진한다고 하였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힘에의 의지의 원칙은 자기 극복의 원칙이 중심이며, 힘에의 의지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힘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은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황의 늪에서 벗어 날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1의 천성과 싸우면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원하는 혈통을 지어낸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2의 천성을 만들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선언은, 19세기 후반에서 종교는 일반적으로 한물 간 상태였으며, 자연과학이 약진하고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신은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또한, 사회와 역사 그리고 개인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된,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은 사회나 역사를 자체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어떠한 신에 관한 가설도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1.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

 

 

 

 

쇼펜하우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철학, , 예술과 같은 학문은 동물들은 인식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라고 하였다.

특히, 한 편의 시는 고유한 사상보다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인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동일하게 감상할 수 있고, 인생의 모습과 인격, 성격 그리고 미래의 상황들을 미리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발굴해낸 상황들을 독자들은 각자의 정신수준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다.

시는 마치 목동이가 지팡이에 의지해 푸른 밭을 마음껏 뛰노는 어린양이라면, 반면, 철학사상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방의 목덜미를 무는 전갈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철학의 체계는 전투적 성향이 강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철학이라고 하였으며,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것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철학사상은 독자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으려는 욕망 때문에 계획했던 독자의 미래의 인생에 대한 오류가 없는 한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사상은 단순한 개념의 학문이 아니라 직관적인 인식에 비롯되며, 이를 자기 안에 저장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철학사상이란, 추상적 개념으로 급조된 저급한 인식의 경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찰과 외적인 관찰 그리고 내적인 경험과 외적인 경험이 근거가 된 인식의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하였다.

철학사상이란, 예술과 시처럼 인간의 세계를 자신의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대한 철학사상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나온다.”고 하였던 것이다.

선험철학사상 시발점의 대상은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상황에서 무시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망각되어서도 안 된다는 전제가 선험철학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하였다.

철학사상의 대상은 다른 학문처럼 특정한 경험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일반적인 경험 그 자체인 것이며, 이러한 경험의 가능성, 영역, 본질적 특성,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 형식과 자료를 통해 의의와 기능을 구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철학사상의 기초 명제는 경험이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추상적 개념으로 직조(織造)될 수 없다고 하였다.

철학사상이 고찰하여야할 명제는 일반적인 경험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매개체로서 외부적 형식과 내부적 성격이라고 하였다.

철학사상의 특징은, 철학자의 위대한 사상은 다른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을 이해하여야만이 완전하게 받아들여지고 향유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상가가 다른 사상가의 철학을 이해했다는 것은, 사실상 그 철학에서 심오한 결점을 발견했다는 것으로서, 이는 사상가가 타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방법은 결점을 찾아내는 것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철학사상은 철학의 주제를 실질적인 인간의 의지로서 철학의 근본을 회복시켜야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의 철학사상은 넓은 의미에서 낙관주의이며, 새로운 생명의 약동, 새로운 시대의 부흥, 새로운 가치관의 성립이었다.

그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바로 욕망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가장 순수한 욕망은 물질에 불과한 인간의 삶을 해탈의 경지로 인도하는 구원이이라고 확신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끝없는 욕망이 반복되는 거대한 시간이었으며, 이러한 욕망의 공허함 속에서 인간의 고뇌가 시작되는 삶이란, 그저 고통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가 생각했던 철학사상의 의미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 현대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의미가 인간의 본질이며, 철학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철학사상의 의미는 더욱 적극적이며, 욕망은 가장 순수한 의미 욕망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욕망의 현상은 바로 인간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욕망을 표상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하였다.

 

 

 

 

20.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이란, 단적으로 정치가 실제로 어떤 것이며, 정치가 어떤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본질을 규명한 것이다.

여기서 정치란 것은, 쉼 없이 강물처럼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면서,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 속성이 있다.

정치의 지배자는 정치권력을 변하게 하거나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구조와 기구로 지배할 것인가를 골몰하게 된다.

, 현실을 중시할 것인가, 가치를 중시할 것인가, 더 나아가 국가를 어떻게 설계하여 건설하고, 유지하여 지탱함으로써, 더 좋은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정치는 갈등의 특성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는 언제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해석으로 정치권력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본질은, 정치학의 규범적 문제의 해결에 있으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 근원에 철학적, 이론적, 탐색을 경주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며, 실현할 수 있는 정치질서와 원리를 탐구하는 입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넓은 의미로 정치철학의 한 작업으로서, 정치사회의 운영원칙의 수립에 대한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이 아닌 정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정치적 구성주의라는 이론적 입장을 표현했다.(롤즈)

여기서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은, 탁월성에 있어서 정치적 문제를 종교나 도덕, 그리고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시켜 정치영역자체에서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철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각시켰다.

롤즈의 가장 적합한 정치관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전생에 걸쳐 사회의 완전한 협력적 구성원인 시민상호간의 세대에 걸친 공정한 사회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현대 자유민주사회의 특징으로서 규정하는 합당한 다원주의의 현실에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간에 다원성의 사회에서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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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Mill)의 정치철학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520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유년시절부터 천재교육을 받으면서, 엄격한 부친의 지도하에서 3세 때에 그리스어, 8세 때에 라틴어, 12세 때에 논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정당인 휘그당에 가입하여 하원의원으로서 사형제와 노예제 폐지 및 여성참정권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이전의 인식은 불가능하며, 오직 경험적인 인식만 존재한다고 했으며, 수학과 논리학도 경험과 경험의 귀납적 일반화에 의지한다고 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갖는다고 했으며, 공리주의를 도덕의 토대는 최대 행복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러한 행복은 쾌락내지 기쁨의 개념으로 불쾌감 내지 고통이 없는 것이며, 일종의 쾌락주의라고 했다.

그의 공리주의란, 질적 쾌락주의를 전제하면서, 오직 향락주의 자를 위한 윤리학이며, 벤담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응하려는 목적에 전개되었다.

그의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을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의 기준으로 간주하고, 지적이고 창조적인 혹은 사회적 활동에서 오는 쾌락주의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다면, 공리주의는 향락주의 자를 위한 윤리학일 뿐이며 비난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향유하는 기쁨의 순위는 학문적, 예술적 그리고 인간적 활동에 우선권을 주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종류의 기쁨에 우선권을 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공리주의는 설득력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의도는 훌륭한 평가를 충분히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경제이론은 분배법칙과 생산법칙을 근원적으로 분리하면서, 부의 생산법칙이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의 결과로 인간의 처분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부의 분배는 인간의 책임에 속하며, 분배는 생산에, 생산은 다시 분배에 영향을 주는 상호관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론에서 정치적 자유로서 개인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사회적 자유로서, 사회가 정당하게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개인의 사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로 확장했다.

밀의 정치적 사유로서 개인의 자기 권리와 자기 책임의 사상은 세계에서 폭넓게

수용되어 높게 평가 되었다.

 

 

 

 

36.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 이성의 철학자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를 하였다.

이러한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며, 지성 또는 이성은 속성을 지각할 수 있으므로 신은 인간에게 불가해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초월한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인간은 목적론적 편견을 비롯한 숱한 편견과 가상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이지만, 이러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오직 도형의 본질 및 특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이성의 무기력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한 철학자로서, 인간은 욕망과 정서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자인지 철저하게 파악하였다.

그는 인간들이 참된 이성보다 의견에 더 동여되며, 좋음과 나쁨에 대한 참된 인식이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자주 온갖 종류의 욕심에 굴복한다고 했다.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행한다.”이는 이런 저런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이 파악한 것과 정반대 일을 행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성의 역량에 대한 진정한 시금석은 이성이 사변적 성찰의 대상에 정확히 인식하느냐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무관하게 인간들을 유혹하여 이끌어가는 상상과 욕망의 힘을 이성이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여 조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직관적 지식으로서 인식은 신의 어떤 속성들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실재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는 정신의 최고선은 신에 대한 인식이며,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인간의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 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임과 동시에 관념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간의 모든 정서는 욕망, 기쁨, 슬픔 이라는 기본정서에서 파생된다고 간주했다.

여기서 정서는 사유 속성에 속한 관념으로서, 인지적 기능의 관념은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고 했다.

결국, 인간의 정서들은 새로운 인과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의 본성과 상반 된 정서들에 의해 갈등을 겪지 않는 한은, 지성의 방향에 따라 질서에 의해 신체의 변용들은 질서를 지키는데 연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했다.

 

 

37.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사상(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정의가 없는 국가는 커다란 도적 떼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그들의 우두머리 아래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를 결의하고 노획물을 합의에 의한 법률에 따라 나누어 갖는다고 했다.

그의 고백록에서는, 신에 대한 찬양방식의 고백은 때로는 신앙에 대한 고백이면서, 때로는 자신의 죄로서, 지난날의 더러움과 내 영혼이 지은 육체 속의 죄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삶의 역정을 담고 있으며, 자신이 거쳐 온 영적인 성장과 지성적인 발전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을 했다.

그리고 창세기 해석과 시간의 문제, 영원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 그 권위를 인정을 받고 있다.

정치사상에서는, 진정한 행복, 영혼의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서면 가능하다고 선언했으며, 교회밖에 구원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관용에 대한 내용은 어떤 믿음을 가질지는 자유로운 양심에 따른 문제이므로 이교도라고 해서 폭력적으로 개종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교도적인 철학의 근본적인 사유를 기독교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 신앙과 철학 중 철학이 주도적이 되거나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식론의 문제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데아 세계에서 참된 앎의 근거를 찾았으나, 그 자체를 존재하는 비인격적 존재성을 부여하지 않고, 이데아는 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 보았다.

그의 사상의 다른 측면은, 인간의 정신은 신의 정신과 닮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신의 정신이 가진 것과 같은 자립성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에 신적인 조명만이 불충분함을 채워준다고 했다.

그의 신학적, 윤리적인 인간이성에 대한 제약과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식론적인 태도를 윤리학에서 그대로 적용한 사상이었다.

그는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교도적인 행복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인간의 존재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행복을 구원에 이룰 수 없고, 오직 신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베풀어주는 선물, 은총을 통해서만 이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그는 인간의 윤리적 능력을 평가절하 하면서 동시에 철학의 효과도 제한적으로만 인정을 했다.

결국, 신의 은총은 신이 자기 마음대로 내려 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당연히 받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신의 은총의 여부인 것이라 했다. 오직, 신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인간은 악한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한 것을 향해 나아 갈 수 있다고 했다.

 

 

 

 

38.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사상

 

 

1. 지성과 직관

 

20세기 대중적인 인물은 앙리 베르그송(1859~1941)으로서, 낭만주의자, 실용주의자, 신비주의자인, 그는 과학과 논리학이 궁극적 실재를 꿰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과 지성은 기계적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취급 될 수 없으므로, 통상적인 수학적, 물리적 방식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과학자들은 파괴하며 의미를 놓친다고 하였다.

직관은 실재적이며 직접적인 생명이며, 자신을 직시하는 생명이므로 수학적 지성을 피해가며, 오직 일종의 예감에 의해서 이성보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감정에 의해서만 이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직관은 본능과 같이 지성과 과학보다 삶에 더 가까워 실재적인 것, 생성하는 것, 내면적 지속, 삶과 의식을 직관의 기능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형이상학

 

베르그송이 지성과 직관, 과학과 철학을 나누는 분명한 구분은 이원론적 색채를 띤 형이상학에 근거로 하였다.

정신과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힘, 기억으로 과거 위에 과거를 쌓아 올리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조직을 하기 위해 과거에 의존하는 창조력이라고 하였다.

의식은 서로 계기하는 부분들을 단순히 배열이 아니라 분리가 불가능한 과정으로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용이라 했다.

의식은 원천적으로 살아 있는 물질에 현존하며, 삶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존재는 무 규정과 비예측성으로서, 가능한 행위를 선택하는 저장소라고 하였으며, 의식은 지속적으로 창조하고 증식하는 작용을 하지만, 물질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없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의식은 물질을 조직하고 그것을 자유의 수단으로 만들려고 할 때는 덫에 걸리게 되며, 자유는 자동현상과 필연성에 따라 다니므로 그것에 의하여 질식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모든 체결된 습관에 따른 습관을 대립시킬 수 있으므로 필연성에 맞서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또한 기억이며, 본질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과거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것이지만, 순수 의식에는 과거의 어떤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의식적 인격의 전체 삶은 분리 불가능한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생을 넘어서 계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세계만 불멸의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3. 도덕과 종교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본성에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인식론에서 지성과 직관의 대립으로, 형이상학에서 기계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으로 대립으로 등장시켰다.

1) 도덕은 사회의 구조와 사회의 요소들이 서로 발휘하는 압력들로부터 비롯되는 의무를 근거를 두었다.

2) 도덕은 창조적 도덕이며, 인간의 도덕적 천재와 통찰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였으며, 이 두 도덕 사이에는 정지와 운동 간의 전체 거리가 있으며, 종교에서 인간 정신의 신화 창출적인 행위의 산물인 정적인 종교와 참된 신비적 통찰과 연관된 종교를 비슷하게 구분하며,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의 근본적 대립을 철학의 모든 국면에 속속들이 나타내었다.

 

 

 

 

 

39. 존 로스의 정의의 원칙

 

 

 

 

정의의 원칙

 

 

그는 분배의 정의에서, 칸트의 철학처럼, 국가는 시민들이 행복하도록 도울 수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고 했다.

국가는 법률을 통한 자유의 확보에 법의 목적과 목표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과 같이 유사하게 그는 정의의 원칙으로부터 행복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정의의 원칙은 사회적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의 전제에 속하는 사회적 기본재화라고 했다.

이러한 특징은, 이런 재화들의 힘과 지능 그리고 풍부한 아이디어 등과 같이 자연적 기본재화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조건이 주어진다고 했다.

모든 종류의 삶의 계획에 필수불가결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가능한 많이 최대한의 것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 기본재화의 개념을 공기, , 식량 등과 같은 생물학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재화가 아니며, 의복과 주거, 신생아의 애착 욕구 등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 권리와 자유를, 더 나아가 기회와 권력, 특히, 자기 존중 등의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사회적 기본재화 사상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권리, 자유, 기회와 권력, 자기 존중 등 경험적 내용이 풍부하고 이론이 규범윤리의 맥락에서 쉽게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패러다임 변화는 기본재화는 권리와 자유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야경국가의 축소가 아니라 고도의 사회적 국가를 지향했다.

그의 정의의 원칙은, 1, 각자는 모두에게 가능한 평등한 기본자유라는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2,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만족조건은 공정한 절약원칙의 한계 아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불평등은 공정한 기회균등에 맞게 모두에게 개방된 직책 및 직위와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절대적 우선권을 갖으며, 자유주의적 자유권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참여권도 포함된다고 했다.

, 자유주의적인 현대자유와 민주주의적인 고대의 자유를 결합시켰다.

 

 

 

40. 헤겔의 이성 철학

 

 

 

현대사회는 이성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가득하지만, 헤겔의 이성철학은 애초부터 합리성과 필연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활동을 전제로 하여 출발했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지식활동을 철학이라고 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지식)를 사랑하고 알고자 하는 의미라고 했다.

알고라 함은 대상의 운동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운동을 그 근거로부터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대상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상을 통제하는 적극적인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대상은 아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행위 주체의 행위양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 자유는 자연이나 우연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계에 대한 필연성을 인식할 때, 얻게 되는 것으로, 앎은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다.

이런 자유라는 방임이나 방종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했으며, 대상을 필연성과 합리성에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의 출발이며, 역사라고 했다.

근대의 인간은 권위와 자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면서, 이성적 통찰에 인간 자신의 삶을 맡김으로써, 자유를 인간성의 핵심을 삼으로써, 이성과 자유는 근대성의 핵심개념에 속한다고 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인간 지식의 진보와 자신감으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이성적 사유의 중요성은 심화되었다.

18세기에는 계몽의 대상은, 이성을 기초로 하여 어둠과 미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해방운동으로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그치지 않고 심리현상이나 사회현상 등을 포함했다.

이는 모든 진리성이나 정당성의 최종적 판단자로서 지적 운동이며, 이성주의의 정점이라고 했다.

19세기는 예술적 운동은, 이성보다 개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로서, 이 운동은 계몽의 이성을 비판하면서, 이성이 인간을 분열적이고 파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계몽의 이성이라고 했다.

결국, 헤겔은 계몽과 낭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던 시기에 활동한 근대의 마지막 철학자로서, 양자의 종합을 좀 더 큰 이성의 이름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헤겔이 이성적 사유를 강조하는 모든 운동에 비판을 가하는 현대의 반 합리주의 경향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는 이성의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성주의에서 벗어 난적이 없었다.

 

 

 

 

 

41. 사르트르의 철학사상

 

 

 

사르트르의 철학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점으로 하여, 전후로 나타났으며, “나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정열을 가졌다.”고 했으며,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에 집중을 하였다.

그는 헤겔, 후성,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 수용하면서, “현상학적 존재론의 정립을 시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계기로 사회적 역사적 지평에 선 구체적 인간을 이해하려는 정열로 확대 했다.

그 결과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인 존재와 무보다 더 많으면서 미완성인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남아 있다.

그는 인간이 목표에 대한 실천을 지배하거나 논리로 이성으로 규정한다고 하며, 이성은 보통 인간의 사유 활동을 총괄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성의 개념을 존재와 인식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사유를 계승하면서, 존재를 인식에 앞세우는 것은, 정신보다 물질을, 사유보다 존재를 우선시 했다.

이는 이성을 객관적 존재를 인식으로 통합시키는 지나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사유 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객관적 존재에서 작용하는 활동인 실천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사유 활동으로 파악하였으나, 그는 이성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견해를 종합하고 있었다.

그는 이성에 관한 규정을 존재와 인식, 물질과 정신 또는 존재와 사유사이 관계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와 다르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효용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실존주의를 통해 그 단점을 보완하려했다.

결국, 헤겔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로 사르트르 역시 존재와 인식 사이의 관계에서 이성의 그 자체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실천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논리로 이해되는 이성은 이미 변증법적 이성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실천은 그 자체도 총체적이고, 이전 실천의 이해과정은 그대로 총체화의 과정이라고 했다.

, 인간은 욕구의 주체인 물질적 주체로서, 죽음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은 때로는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여러 물질세계 역시 인간과의 관계에 총체적으로 개입한다고 했으며, 인간들 각자의 개별적 실천은 그대로 총체화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과제중 하나는 개인의 차원에서 유효할 수 있는 변증법적 이성을 역사 전체로 확대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42.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

 

 

 

1. 삼균주의의 역사적 배경

 

조소앙의 사상적배경은, 1921년까지 불균등문제를 파악하기 위하여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는 애국청년이었으며, 일본 유학시절과 망명활동 중에서도 삼균주의에 대한 용해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대한 시대적인 배경은, 그 시대는 제국주의 열강의 쟁패전으로 인한 최대의 격동기이며, 한민족의 망국적인 비운을 겪는 수난기였으며, 약소민족의 국난타개와 역사적인 전환을 위한 사상적인 무지상태이었다.

삼균주의의 역사적인 기초는 평등론에 역사적 근거를 찾는 일이며,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이 역사적으로 합리화 하느냐에 있었다.

삼균주의 철학적인 기초는, 분절, 정서와 형식, 내용과 실질, 주체와 대상, 인계와 사회이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태극기 민족혁명론, 기 행 과의 이론, 진 선 미의 이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삼균주의의 이론체계는, 균등주의로서 사상적으로 철저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의 삼균주의를 정립하여, 국내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신간회가 창립되자 중국 각지에 산재한 망명한 지사들을 모우고 좌우양익을 통합하려는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이 운동의 주역은 안창호 조소앙 홍진 진덕삼 정학빈 김동삼 등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자신이 기초하여 19341128일 임정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19411125일 정식 공포된 건국강령의 내용이었다.

 

2. 삼균주의의 제도와 정책

 

1) 정치적 균등

 

(1) 인민의 기본 권리와 의무

노동권, 휴식권, 피구제권, 면비 수학권, 참정권, 선거권, 피선거건, 입법권, 결사권, 남녀평등권, 신체 거주 언론 저자 출판 신앙 집회 여행 시위 통신 등의 자유보장, 보통선거권, 평등 직접 비밀선거, 준법 납세 병역 공무 조국건설과 보위 등의 의무, 부적자 독립운동방해자 건국강령반대자 정신 결여 자 범죄판정자의 선거권 피선거권 박탈.

(2) 국무회의 의정원 지방자치단체 등의 조직

국내 총선거에 의한 새 행정기관 편성, 도 부 군 도 별로 지방의정원을 세움.

 

2) 경제적 균등

 

(1) 국유와 사유의 구분, (2)재산의 몰수와 몰수재산의 처리 규정, (3) 경제활동금지 규정, (4) 국제무역과 전력 등의 국영화 규정, (5) 사회보장 규정, (6) 토지분배 규정을 두었다.

 

3) 교육적 균등

 

교육이념을 삼균주의 제도의 원칙으로 삼고, 국비교육, 면비교육, 교육기관설립, 교과서 편집과 인쇄 발행, 군사교육, 교육정책으로 공 사립학교의 국가의 감독과 교육정책준수사항을 규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삼균주의의 제도와 정책을 헌법에 실시하여 정치경제 교육의 민주시설의 균형을 도모하도록 하는 제도적인 개혁정책이었다.

 

 

 

 

32. 근대 철학의 정신

 

 

 

1. 근대 철학의 특징

 

새로운 시대의 역사는 반성적 정신, 비판의 소생, 권위와 전통에 대한 항거, 절대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항거이며, 사유와 감정 그리고 행위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이행기가 시작되면서, 여러 세기 내내 강렬하면서,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갈등은 국가는 해결되면서, 문명의 기간으로서 교회의 자리를 대신 하였으면서, 교회주의는 국가주의에 항복하면서, 국가 안에 입헌주의와 민주제도의 경향이 켜지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평등한 권리와 사회정의에 대한 오늘날의 요구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교회의 권위에 반대한 독립 정신은 국가의 간섭주의를 공격했으며, 정치적 불간섭의 이론은 개인주의의 이상으로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경제영역에서 노예제도, 농노제, 길드제도는 사라지면서, 개인주의(자유방임주의)이론이 언급되었다.

중세 다음 시대는 좀 더 높은 지성 생활의 특징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항구적 신념, 자연적 사물에 대한 강렬한 관심, 문명과 진보를 향한 생동감 넘치는 열망이었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실천적 적용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과 기술에 대한 업적을 이룰 시대를 열정적인 낙관론을 가지는 근대 철학의 정신을 가졌다.

이는 진리 탐구에서 독립적이라는 데서 고대 그리스 사상과 비슷한 것으로서, 인간 이성을 지식 추구에서 최고 권위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합리론적인 것이다.

외부의 자연을 설명하는 자연주의적이며 새로운 학문들과 내부자연을 연구하는 과학과 접촉하므로 과학적이다.

근대 철학은 스콜라주의적인 체계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했지만, 이전 개념들 가운데서 대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와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2. 합리론과 경험론

 

현대철학들은 지식의 원천과 규범으로 이성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경험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합리론적인 철학 혹은 경험론적인 철학으로 구분하였다.

1) 근대의 모든 철학 체계는 합리론적인 분류로서, 지성보다 감정과 신앙의 직관에서 진리의 원천을 추구하는 근대적 세계관이다.

2) 참된 지식으로서 보편적 필요적 판단으로 구성되며, 사고의 목표는 상이한 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진리의 체계라는 데서 합리론적인 것이다.

3) 천부적이지 않는 진리가 있으므로 필연적 명제는 필연적이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므로 개연적 지식을 산출할 따름이므로 경험론 또는 감각론이다.

이러한 경험론은 경험의 세계가 철학의 대상이며, 철학이 그 세계를 해석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면, 모든 근대 철학은 경험론적이 된다.

 

 

 

 

33. 근대 철학의 흐름

 

 

 

근대 철학의 흐름은 두 줄기로서, 합리론과 경험론이었다.

합리론은 비합리성과 우연성을 배제하고 이성과 논리와 필연성을 중시하는 철학으로서, 인간의 내면에는 선천적으로 이성이 존재하며, 이 이성에 의해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으며, 이성을 선천적인 인식능력이라고 믿고 학문 방법으로 연역법을 사용했다.

연역법이란, 일반적 원리를 전제로 놓고 개별적 명제를 끌어내는 추론 방법으로서, 예를 들면, 일반적 원리로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로 홍길동은 사람이다.

결론은 홍길동은 죽는다는 이론이다.

주로 유럽에서 발전한 근대 철학으로서 수학적 인식을 원형으로 하는 논증적 지식을 중시하여 논리학과 수학을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했다.

합리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다.

경험론은 인식, 지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철학적 입장으로서, 영국에서 주로 발전을 하였으며, 영국의 경험론의 원조는 중세 말기의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경험론은 홉스를 거쳐 로크, 버클리, 흄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들에 의하면, 모든 인식은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만 생겨나며, 학문 방범으로는 개별적 사물을 종합해 일반적 원리를 끌어내는 귀납법을 이용했다.

결국, 합리론의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본유관념으로써 이성의 보편적 지배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였으며, 반면 경험론의 철학자인 로크는 경험 이전의 어떤 보편적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고, 만물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한다고 하며, 이 백지상태에 여러 경험이 채워지면서 인식과 판단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었으며, 플라톤은 만물의 근원인 이데아가 먼저이며, 현실의 여러 현상은 이데아의 파생물에 불과하다는 합리론의 전형이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경험적 현실을 중시했으며, 동물학, 자연학 등 과학 영역에 관심이 많아 경험론이 원조라고 했다.

 

 

 

 

 

34. 근대 철학의 거성 스피노자

 

 

 

17세기 네덜란드의 위대한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유복한 유대인 상인의 자녀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가업을 이을 생각에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유대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파문당하고 이 때문에 유대 사회와 단절되었다.

그는 익명으로 1670신학정치론을 발표했으나, 1674년 금서로 지정대었으며 1675년 주요 저서인 윤리학을 발표를 했다.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으로서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겨있으며 지금도 많은 철학자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생각이 적혀있다.

그는 윤리학에서 사물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있는데 이 근본 원인을 자기 원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자기 원인이 실체, , 자연과 동일하며, 신은 무한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자연은 신이 가진 무한의 속성의 한 모습이라고 주장을 했다.

신이야말로 만물의 내재적인 원인이며, 여기에서 신의 자유라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라고 말하는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그것을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하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는 신과 자연은 자기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자기 원인을 가진 존재는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사는 존재로 자기를 존속시키는 힘인 코나투스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했다.

코나투스란, 원래 노력, 충동, 경향, 성향, 약속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스피노자는 사상이 본래 가진 자신을 계속 존재시키고, 더 드높이려는 성향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모든 것의 정의는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단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 다고 생각했다.

자기 파괴에 저항하는 스피노자는 인간이 계속 존재하려는 코나투스라고 정식화 했으며, 물체에 관해서 설명할 때도 코나투스를 사용해, 물체는 외적인 힘의 활동 없이는 파괴되지 않으며, 운동과 정지도 흐트러지지 않는 한 무기한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자기 원인과의 관계성 문제로 대해 인간의 감정은 욕망, 기쁨, 슬픔 세 종류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부 원인으로 발생하는 기쁨이 사랑이며 외부 원인으로 발생하는 슬픔이 고뇌라고 그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점이 인간이 굴종하는 원인이며, 인간은 이성을 따름으로써, 처음으로 굴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성을 바탕으로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직관지를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며, 직관지를 획득해 자유롭게 되는 것에 도덕적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가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적인 신도, 유대교적인 신도 아닌 신즉 자연, 다시 말해 신으로서의 자연, 자연으로서의 신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만물을 영원의 상아래서 본다.”는 말은 여러 사상에 대한 그만의 기본적인 존재 이해 방식인데 데카르트처럼 심신이원론이 아닌 정신보다 신체를 중시했다.

결국, 스피노자의 사상은 17세기 근대합리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이론으로서 철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35. 니체의 철학

 

 

 

니체는 인간은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간주되며, 감성은 신체와 감각뿐만 아니라 소유욕과 명예욕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충돌하게 된다고 했으며, 이러한 감성은 이기적인 반면에 이성은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여기서 보편적인 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은 감각적인 욕망이나 충동뿐 아니라 소유욕이나 명예욕과 같은 욕망을 근절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원래 보편적인 것인데 인간은 서로를 구별하는 신체를 통해서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며, 따라서 인간의 감각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욕망은 모두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금욕주의를 주창하였으나, 인간은 욕망을 근절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자연적인 욕망이기에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어 자신을 학대한다고 했다.

니체의 철학의 주요 목표는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이성 중심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 인간은 건강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규정을 선과 악이란 개념과 행복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면서, 선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며, 악은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선은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며, 악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선은 인가의 힘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악은 인간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했다.

결국, 선과 악의 개념은 전통적인 가치 기준에 대해서 탁월함과 저열함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였다.

 

헤르만 헤세의 시 단계에서 니체의 사상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하듯이

일생의 모든 시기와 지혜의 덕망도

그때그때에 꽃이 피는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 용감히 서러워하지 않고

새로이 다른 속박으로 들어가듯이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 한다.

 

 

36. (Mill)의 정치철학

 

 

 

존 스튜어트 밀(Jouhn Stuart Mill)19세기의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당대의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자유주의 정당인 휘그당에 가입하여 하원의원으로서 사형제와 노예제 폐지 및 여성참정권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 이전의 인식은 불가능하며 오지 경험적인 인식만 존재한다고 했으며, 수학과 논리학도 경험의 귀납적 일반화에 의지한다고 했다.

그는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갖는다고 했으며, 공리주의를 도덕의 토대는 최대행복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행복은 쾌락 내지 기쁨의 개념으로 불쾌감 내지 고통이 없는 것이라며, 일종의 쾌락주의라고 했다.

여기서는 벤담의 공리주의 원리인 최대 다수는 최대행복이라는 의미는 없다.

그는 공리주의란, 질적 쾌락주의를 전개하면서, 오직 향락주의자를 위한 윤리학이며, 벤담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응하려는 목적에서 전개되었다.

그의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을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의 기준으로 간주하고, 지적이고 창조적인 혹은 사회적 황동에서 오는 쾌락주의에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공리주의는 향락주의자를 위한 윤리학일 뿐이며, 비난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향유 하는 기쁨의 순위는 학문적, 예술적 그리고 인간적 활동에 우선권을 주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종류의 기쁨에 우선권을 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근 파업에 관한 공리주의는 정의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도덕적 요구와 관련해서는 아주 유용하며, 여기서 자연적 정의감의 실존을 인정하면서, 이것은 근원적 감정이 아니라 이끌려 나온 감정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주장은 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들을 존중하라는 명령, 누구에게나 자싱이 번 것을 주라는 명령 등 불편부당함과 평등의 사상 등을 구별했다.

결국, 그의 공리주의는 설득력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의도는 훌류한 평가를 충분히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밀의 경제이론은 분배법칙과 생산법칙을 근원적으로 분리하면서, 부의 생산법칙이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의 결과도 인간의 처분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부의 분배는 생상에, 생산은 다시 분배에 영향을 주는 상호관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의 자유론에서 정치적 자유로서, 개인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사회적 자유로서, 사회가 정당하게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다루었으며, 여기서 개인의 사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로 확장했다.

무엇보다도 밀의 정치적 사유로서, 개인의 자기 권리가 자기 책임의 사상은 세계에서 폭넓게 영어권에서 수용되어 높게 평가되었다.

밀의 유명한 저서로서는 공리주의와 자유론이 있다.

 

 

 

 

37. 사르트르의 철학사상

 

 

 

사르트르의 철학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점으로 하여, 전후로 나타났으며, “나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정열을 가졌다.”고 했으며,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에 집중을 하였다.

그는 헤겔, 후성,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 수용하면서, “현상학적 존재론의 정립을 시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계기로 사회적 역사적 지평에 선 구체적 인간을 이해하려는 정열로 확대 했다.

그 결과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인 존재와 무보다 더 많으면서 미완성인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남아 있다.

그는 인간이 목표에 대한 실천을 지배하거나 논리로 이성으로 규정한다고 하며, 이성은 보통 인간의 사유 활동을 총괄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성의 개념을 존재와 인식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사유를 계승하면서, 존재를 인식에 앞세우는 것은, 정신보다 물질을, 사유보다 존재를 우선시 했다.

이는 이성을 객관적 존재를 인식으로 통합시키는 지나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사유 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객관적 존재에서 작용하는 활동인 실천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사유 활동으로 파악하였으나, 그는 이성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견해를 종합하고 있었다.

그는 이성에 관한 규정을 존재와 인식, 물질과 정신 또는 존재와 사유 사이 관계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와 다르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효용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실존주의를 통해 그 단점을 보완하려 했다.

결국, 헤겔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로 사르트르 역시 존재와 인식 사이의 관계에서 이성의 그 자체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실천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논리로 이해되는 이성은 이미 변증법적 이성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실천은 그 자체도 총체적이고, 이전 실천의 이해과정은 그대로 총체화의 과정이라고 했다.

, 인간은 욕구의 주체인 물질적 주체로서, 죽음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은 때로는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여러 물질세계 역시 인간과의 관계에 총체적으로 개입한다고 했으며, 인간들 각자의 개별적 실천은 그대로 총체화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과제 중 하나는 개인의 차원에서 유효할 수 있는 변증법적 이성을 역사 전체로 확대를 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38.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사상

 

 

1. 지성과 직관

 

 

20세기 대중적인 인물은 앙리 베르그송(1859~1941)으로서, 낭만주의자, 실용주의자, 신비주의자인, 그는 과학과 논리학이 궁극적 실재를 꿰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과 지성은 기계적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취급 될 수 없으므로, 통상적인 수학적, 물리적 방식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과학자들은 파괴하며 의미를 놓친다고 하였다.

직관은 실재적이며 직접적인 생명이며, 자신을 직시하는 생명이므로 수학적 지성을 피해 가며, 오직 일종의 예감에 의해서 이성보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감정에 의해서만 이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직관은 본능과 같이 지성과 과학보다 삶에 더 가까워 실재적인 것, 생성하는 것, 내면적 지속, 삶과 의식을 직관의 기능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형이상학

 

 

베르그송이 지성과 직관, 과학과 철학을 나누는 분명한 구분은 이원론적 색채를 띤 형이상학에 근거로 하였다.

정신과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힘, 기억으로 과거 위에 과거를 쌓아 올리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조직을 하기 위해 과거에 의존하는 창조력이라고 하였다.

의식은 서로 계기하는 부분들을 단순히 배열이 아니라 분리가 불가능한 과정으로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용이라 했다.

의식은 원천적으로 살아 있는 물질에 현존하며, 삶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존재는 무 규정과 비예측성으로서, 가능한 행위를 선택하는 저장소라고 하였으며, 의식은 지속적으로 창조하고 증식하는 작용을 하지만, 물질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없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의식은 물질을 조직하고 그것을 자유의 수단으로 만들려고 할 때는 덫에 걸리게 되며, 자유는 자동현상과 필연성에 따라 다니므로 그것에 의하여 질식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모든 체결된 습관에 따른 습관을 대립시킬 수 있으므로 필연성에 맞서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또한 기억이며, 본질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과거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것이지만, 순수 의식에는 과거의 어떤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의식적 인격의 전체 삶은 분리 불가능한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생을 넘어서 계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세계만 불멸의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3. 도덕과 종교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본성에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인식론에서 지성과 직관의 대립으로, 형이상학에서 기계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으로 대립으로 등장시켰다.

1) 도덕은 사회의 구조와 사회의 요소들이 서로 발휘하는 압력들로부터 비롯되는 의무를 근거를 두었다.

2) 도덕은 창조적 도덕이며, 인간의 도덕적 천재와 통찰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였으며, 이 두 도덕 사이에는 정지와 운동 간의 전체 거리가 있으며, 종교에서 인간 정신의 신화 창출적인 행위의 산물인 정적인 종교와 참된 신비적 통찰과 연관된 종교를 비슷하게 구분하며,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의 근본적 대립을 철학의 모든 국면에 속속들이 나타내었다.

 

 

 

39. 플라톤의 에로스와 이데아 철학

 

 

 

플라톤의 이름을 딴 플라토닉 러브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마르실리우스 피치누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서 신을 향한 사랑이나 육체를 초월한 정신적인 사랑이라는 의미였으나, 오늘날은 정신적인 사랑을 대표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의 중심적인 언어 가운데 하나인 에로스는 사랑, 혹은 사랑의 신이라는 의미로서, 남성들 사이에 풍부한 경험을 갖춘 노련한 성인이 멘토가 되어 신출내기 청년을 교육적으로 잘 이끌어가야만 한다는 말로서, 기독교 사상과 서양철학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철학에서의 에로스는 파이드로스, 향연 등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었으며, 향연에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의 개념을 인간은 원래 둥근 몸뚱이에 얼굴이 한 쌍, 팔다리가 두 쌍씩 달려있으며, 인간은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양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눈다고 했다.

이러한 모양은 두 남성이 붙어 있으면, 해의 자손이고, 두 여성이 붙어 있으면, 땅의 자손이며, 남녀가 서로 붙어 있으면, 달의 자손이라고 했다.

이는 신의 노여움 때문에 반으로 갈라졌으며, 원래 하나였으므로 두 사람은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으로서, 둘로 나눈 두 사람이 다시 원래의 몸으로 합쳐지기를 열망하는 것이 에로스라 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연인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나 군대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며, 모든 병사가 연인과 함께 싸운다면 아무리 적은 세력이라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여기서 연인관계는 동성애 관계를 의미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인간이 사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하면서, 하나는 육체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사물의 세계로서, 이 영역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하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정신이 머무는 이념의 세계로서 참된 세계이자 영구불변의 세계이며, 인간이 접하는 사물은 이념의 세계에 속한 원형의 복사판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현실의 세계는 가짜이고, 진짜 세계는 이데아에 있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이데아론은 이전에 없었던 철학 이론이었으며, 따라서 서양 철학사를 플라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책상 하나가 거울에 비추고 있다고 하면, 거울에 비친 책상은 진짜 책상의 모사일 뿐이므로 현실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라는 것이다.

이데아는 감각적인 개별 사물을 초월하며, 보편적이면서 영구불변이라는 것과 같이, 영혼 역시 이데아에 근접해 있어 생로병사로 끊임없이 변하는 육체에 비해 영혼은 근원적이고 불변한다는 것이다.

결국, 선의 이데아는 최고의 이데아로서, 눈으로는 인식할 수 없고 마음의 눈, 즉 순수한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는 우주 저편에 존재하며, 다섯 개의 하늘 가운데 가장 높은 최고 천이라고 했으며, 인간의 영혼은 육체에 들어오기에 앞서 우주 저편에 있는 이데아에 속한다고 했다.

영혼은 이성의 힘으로 육체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여러 감각을 끊고 잊어버린 이데아의 세계를 다시 떠올려야 하며, 만약 영혼이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영혼은 육체를 통해 계속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철학자들이 무지한 자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계몽의 맥락에서 자주 인용하듯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명하는 과정을 동굴에 비유하였다.

그는 인간이 보고 느끼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동굴 안쪽 벽면에 투영된 그림자와 같으며, 인간은 이 허상에서 벗어나 동굴 밖의 세계의 진정한 실체인 이데아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 인간은 물질적 차원의 욕망과 관련된 여러 감각들을 끊고, 이성적 사유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40.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내렸다.

이성(도리), 의미는 감정에 의한 혼란, 불화, 갈등, 무질서 등에 따르지 않고, 통일성, 화합, 평화, 질서 등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은 스토아학파는 무 정념의 상태에 의한 자족성의 도달로 표현했으며, 근세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부동의 상태에서 외부 세계의 영향을 극복하고,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윤리학적 개념이라고 했다.

또한, 이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이성에 따를 것을 호소하는 것과 반대로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감정에 호소하다가 앞뒤를 계산하거나 가리지 않고 무리하여 혼란, 불화, 갈등, 무질서에 빠지기도 하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에 복종하며,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그는 인간이 가장 행복한 삶은 관조하는 삶이라고 했으며, 이런 연유는 관조의 활동은 가장 지속적이고, 즐겁고, 자족적이며,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여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 전통의 신관을 거부하며, 신을 순수한 사유 존재로 이해했으며, 인간은 신과 달리 물질적인 조건 때문에 앞의 관조 활동을 평생토록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 안의 신적인 것이므로 이성(nous)에 따른 삶은 보통의 인간적인 삶에 비해 신적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이성이 발휘하는 힘과 가치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사랑하고 만족시키는 사람이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자제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도 이성이 그 사람을 지배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말할 수 있지만, 이는 이성이 바로 사람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이성에 따른 행위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한 행위로 생각하게 되고, 이성이 인간의 자아이므로 훌륭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부분을 사랑한다고 했다.

결국, 인간은 타고난 본성과 습관 그리고 이성을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지만, 동물들은 자연 본성대로 살며, 더러는 익숙한 습관에 의해 살아간다고 했다.

그는 자제력이 있는 사람과 이성적인 헤아림이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며, 자제력과 이성적인 헤아림에서 벗어난 사람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 때문에 행위를 하게 되고,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이성 때문에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므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자제력과 헤아림으로 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4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차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제 지간이면서 학문적으로는 아주 달랐으며, 두 사람의 서양 철학사의 대표되는 이상론과 현실론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전자는 감각적인 현실 세계를 그림자로 보고, 이데아 세계가 참다운 세계로 보았으나, 후자는 가장 핵심적인 이데아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적인 생각과 관념으로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세계뿐이라고 했다.

또한, 플라톤은 육체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이데아를 보는 마음의 눈을 가리는 교란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은 어떤 궁극적인 지혜로 가기 위한 첫 단추이며, 현실을 넘어서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은 초월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므로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은 물론이고, 자연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예술 직품에 있어서도 플라톤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또 다시 모방한 이중으로 헛된 세계라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접하고 느끼며 정화와 배설을 경험하는 카타르시스는 이데아로 접근하는 지름길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르네상스의 시기에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현재 로마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개인 서재 서명실의 벽면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각각 책 한 권을 들고 있으나, 플라톤은 우주와 인간”, “혼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티마이오스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책을 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우주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도덕적 도리를 모두 갖추어야 올바른 삶이라는 작가의 의도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선호하는 학문의 차이가 두 사람의 이념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으나,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서 수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수학의 추상성이야말로 이데아의 세계와 가깝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생물학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개별적 사물은 참된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또 모방이 모방인 탓에 철저한 멸시의 대상이므로 예술 작품으로 인해 느끼는 감동도 한갓 허구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서의 모방은 오히려 이데아를 실현하는 하나의 길이며, 그 실현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희곡의 플롯이라고 했으며, 시학은 희곡을 이야기할 때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고전이라고 했다.

 

 

 

 

42. 헤겔의 이성 철학

 

 

 

현대사회는 이성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가득하지만, 헤겔의 이성 철학은 애초부터 합리성과 필연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활동을 전제로 하여 출발했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지식 활동을 철학이라고 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지식)를 사랑하고 알고자 하는 의미라고 했다.

알고자 함은 대상의 운동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운동을 그 근거로부터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대상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상을 통제하는 적극적인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대상은 아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은, 행위 주체의 행위 양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 자유는 자연이나 우연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계에 대한 필연성을 인식할 때, 얻게 되는 것으로, 앎은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다.

이런 자유라는 방임이나 방종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했으며, 대상을 필연성과 합리성에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의 출발이며, 역사라고 했다.

근대의 인간은 권위와 자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면서, 이성적 통찰에 인간 자신의 삶을 맡김으로써, 자유를 인간성의 핵심을 삼으로써, 이성과 자유는 근대성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고 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인간 지식의 진보와 자신감으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이성적 사유의 중요성은 심화되었다.

18세기에는 계몽의 대상은, 이성을 기초로 하여 어둠과 미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해방운동으로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그치지 않고 심리 현상이나 사회현상 등을 포함했다.

이는 모든 진리성이나 정당성의 최종적 판단자로서 지적 운동이며, 이성주의의 정점이라고 했다.

19세기는 예술적 운동은, 이성보다 개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로서, 이 운동은 계몽의 이성을 비판하면서, 이성이 인간을 분열적이고 파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계몽의 이성이라고 했다.

결국, 헤겔은 계몽과 낭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던 시기에 활동한 근대의 마지막 철학자로서, 양자의 종합을 좀 더 큰 이성의 이름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헤겔이 이성적 사유를 강조하는 모든 운동에 비판을 가하는 현대의 반합리주의 경향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는 이성의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성주의에서 벗어 난적이 없었다.

 

 

 

 

43. 꿈을 실현 시키는 철학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도전에는 나이가 필요 없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서 가버린 시간을 늦게나마 깨달았을 뿐이며, 누구나 새로운 도전에는 열정이 없으면 따분하게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

인생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성공이냐, 실패를 계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야 하며, 삶이란, 영원한 행복도 불행도 없는 것이므로 그냥 열심히 노력하며,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이 변하여도 신은 원하는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게 됩니다.

인간이란, 더 많은 욕심으로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만족하는 마음을 채울 수 없게 되며, 마음의 그릇을 채우려면 현재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이 무엇이든지 만족하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진실 된 마음으로 위로하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여야지, 거짓말이나 가벼운 다독거림은 슬픔과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는 체면치레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구나 가끔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를 자문하지만, 인생이란,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서 가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에 헤어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일수록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의미를 찾으면, 행복은 바로 자기 옆에 이미 온 것을 못 느낄 뿐입니다.

행복은 자신 스스로가 다가가서 가까워 졌다는 것을 느껴야 하며, 누가 그냥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니므로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노심초사하여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꿈을 현실로 바꾸는 생각과 노력 없이, 그냥 공짜로 얻거나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며, 이러한 행태는 나 자신이 가장 무지하여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여 보는 시각이, 자신이 살피지 못한 엄청난 사실을 확인했을 경우는 인정하여야 합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언행에서 실수를 줄이면서, 현재의 모습에서 시간과 나이게 관계없이 새롭게 보다 낳은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듯이 무작정 자신의 인생을 퍼즐 맞추듯이 하면, 해결되지 않으므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처방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언제나 불확실성을 동반하여 확실한 것이 없고, 생각보다 넓고 복잡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하지만, 자신이 예측하여 판단할 수 있는 범주에서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마냥, 걱정과 두려움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신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므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정면 돌파하여 극복할 방법을 스스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야 야지, 인생의 삶이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갈등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만 고수한다면 패자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갈등의 원인을 분석한다면, 갈등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여 혼자는 절대로 살아 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한 척해도 인간의 나약함은 원초적인 본능이므로, 이는 사람들과의 공동체 삶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품위 있는 삶이란, 나이가 들수록 평온과 넉넉함으로 지혜롭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야지, 쓸쓸함과 고독한 삶으로 자신을 위축하게 만들거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외롭게 하여 질병과 소외 등으로 삶을 단축시키는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탄만 말고, 새로운 도전으로 꿈을 실현시킨다는 욕구는, 아름답고 적극적인 삶으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44. 마르크스의 소외 사상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가장 심오한 철학적 진지함을 가장 날카로운 위트와 결합을 했다.

그는 라인신문 편집인으로서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 조직체와 접촉하면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다.

그는 1848년 공산주의자 연맹의 요청으로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였으나, 재정적으로 뒤 밭침 해준 엥겔스가 조금은 수정했다.

이 둘의 선언은 정치적 효력은 없었지만, 나중에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1859정치경제학 비판을 제3권의 주저인 자본을 썼으나, 2권과 제3권은 엥겔스가 후기를 추가해서 나중 출간했었다.

1883314일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엥겔스는 임노동 계급을 근대 자본주의의 생산체계로부터 해방하려는 투쟁이 그의 참된 소명이었으며, 보다 더 활동적인 전사는 없었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1844경제학-철학수고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입장에서 기획된 국가 경제가 어떻게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제시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빈곤, 나아가 궁핍으로 끝나게 되는 것은, 이윤상승을 목표로 하는 자본의 매각은 거대자본을 이롭게 하는 데는, 거대자본이 소자본을 파괴하고 기본소유(토지)를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다른 한편 잉여노동을 통해 노동임금을 최소한의 생존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절대적 빈곤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만 노동임금이 자본소유자의 부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한데서 오는 빈부격차가 벌어진다고 했다.

그는 국가 경제 비판을 인간과 노동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을 확장시킨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서 같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낯설게 되는 소외인 것이라 했다.

그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생산수단인 사적 소유는, 노동 생산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의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노동하는 자로서 자신으로부터 소외, 그리고 사회적으로부터의 소외라고 했다.

이러한 연유는 그는 노동자는 자본가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상품을 스스로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명 활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노동은 본질상 강제 노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인간은 유적 존재에서 소외되는 것은, 유의 활동에서 가공된 자연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인간은 자기의 동료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나아가 오직 노동자로서 개인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헤겔은 노동의 세계가 시민사회까지 확대되어 노동자의 상황이 개선된다면, 노동의 세계는 소외라는 부정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구조적 이윤도 자유에의 본질적 기여도 지각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수용하면서, 노동에 종속된 왕국과 노동을 벗어난 자유의 왕국을 분리했다.

 

 

 

45.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사상사의 계보로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정치적 저작인 군주귀감서이며, 일찍이 세계의 유명한 사상가들의 정치사상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군주론은 진정한 군주가 무엇이며, 어떻게 키워 낼 것인지를 담는 책이다.

현명한 지배자는 자신이 한 말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경우, 그런 약속을 하도록 유인했던 근거들이 사라졌을 경우, 자신의 말이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배자라는 것은, 필요할 때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가차 없이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으며, 자신의 수단인 권력을 발휘하여 지배를 실현함으로써, 자신과 인민들 모두에게 고귀한 삶을 영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군주라면,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확장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며, 유능한 권력의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의 도덕적 대립이 아닌 권력의 현실적 작용에서 성공과 실패 사이에 평가된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도덕적 군주가 어떻게 더 쉽게 지배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어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 정당한 것인지, 그 자체로서는 정당성이 의문시 된다.

그는 군주가 명성을 얻기 위한 행동은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유례없는 비범한 행동을 보여주어야 매우 유익하다고 했으며, 우유부단한 군주가 현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중립적인 행동은 파멸의 원인이 되고 적을 만들뿐이라고 했다.

그는 신하가 군주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 것은 좋은 신하가 아니며, 신뢰할 수 없으므로 신하는 군주에 관해서 생각하고 군주의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군주는 신하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하를 우대하고 부를 누리게 하며 가까이 두어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했다.

군주는 신하의 아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가 어려우므로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듣더라도 결코 화내지 말며, 현명한 군주는 사려 깊은 신하를 선임하여 그들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그것도 허용할 경우에만 허용해야지 아무 때나 허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군주론은 폭군을 위하거나, 권모술수를 위한 저서도 아니며, 국가가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나아갈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집필 된 것이다.

그의 군주론은 현실정치의 바이블이며, 정치권력의 정통성과 타당성을 위해서는 왕도는 덕치에 있고, 군주는 성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46. 사회사상에 관하여!

 

 

 

1. 사회사상의 역사

 

 

사회(society)라는 의미는, 의식적으로 한정되어 있어. 인간의 사회 일반을 뜻하지 않으므로 실질적으로 근대사회,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시작되는 유럽사회와 북미 대륙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유럽 사회는 고대. 중세사회는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사회가 세계화 되고 지구상의 여러 민족, 국민 간의 교류가 인류사회의 양상을 바꿔 가는 오늘날 사회라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고유의미의 사회는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합리적 국가를 가지는 사회와 시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서 인류역사상 근대 이후의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물론, 근대 이전의 여러 사회에서도 유럽이든 아시아든 다양한 국가에서도 시장경제가 존재하였으나, 이 경우의 국가는 근대적 의미의 법치국가가 아니었으며 시장경제를 일반적 기초를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테네의 도시국가는 노예제도를 대전제로 하는 국가였으며, 시장경제도 노예제도에 의해 자급자족의 경제구조였다.

결국, 현대적 의미의 사회라는 의미는 16세기 이후를 대상으로 근대사회로 한정 하면 500년 가깝게 역사를 가지고 있다.

 

 

2. 사회사상의 방법

 

 

근대유럽의 사회사상의 추적 방법은 경제학적 접근법, 철학. 윤리학적 접근법, 법학, 정치학적 접근법이 있다.

여기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접근법은 스미스 경제학의 성립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의 성립으로서, 스미스 이전과 마르크스 이후 사상가들의 평가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에서 스미스 이전은 경제학적 사회 인식의 발전사가 사회사상의 기본선으로서 정치사상이나 도덕사상이었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은 근대 영국의 윤리학을 대표하며, 그것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도덕 판단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도덕적 선악, 옳고 그름의 구별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설명했다.

또한, 그의 국부론에서 경제학과 사회사상의 관계와 도덕 감정론속에 윤리학과 사회사상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므로 국부론이 스미스의 경제학을, “도덕 감정론이 스미스의 사회사상을 대표하면서, 스미스의 인간관, 사회관, 역사관을 밑바탕을 둔 사회사상이었다.

법학 혹은 정치학의 기초학문의 학설이나 이론의 역사적 전개에서도 마키아벨리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을 거쳐서, 홉스, 로크, 루소, 토크빌, , 베버로 이어지는 정치사상의 계보인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자기 보존의 원리에서 찾고, 이기적 개인의 집합에서 정치적 질서의 생성을 찾고, 근대적 국가 주권의 기초를 다지는 획기적 업적을 이루었다.

결국, 현대의 사상가들은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로 특화되어 그들의 고유한 사회사상을 논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3. 시대와 사상의 문맥

 

 

사상가들의 사상은 시대의 문맥과 사상의 문맥의 요인으로 형성되었다.

사상가들은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과 사상적, 학문적으로 여러 세대로부터 받아들인 특정한 이념, 개념, 체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사상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시대의 문맥 속에서 선행 세대의 사상의 전통에 의해 구성되는 사상의 문맥을 계승하는 과정으로서 유럽 2천 년의 사상 전통에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해 왔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각 사상가들은 독자적 관점과 사고방식으로서 선행 세대 전부터 계승된 사상에서 새로운 시대의 문제를 다루면서 확실하게 질적인 변용이 되었다.

그러나 특정 시대와 사회의 배경에서 특정한 사상을 평가하는 방법이나 반대로 어떤 사상 전통의 계속성과 일관성을 강조하는 방법은 온전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두 사람 관계에서 시대의 문맥에는 시대와 사상이라는 두 문맥의 구별과 관련된 근본적인 사회사상에서 역할이나 공헌, 비판과 계승 관계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4. 사회사상의 기본문제

 

 

근대 이후는 물론, 고대와 중세에서도 사상가들의 사상은 인간의 자유로서 정치나 사회의 제도로서 실현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자유의 관념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에 걸쳐 그 의미의 내용은 변화가 되었다.

예를 들면, 아테네의 공화제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는 정치적 공동체로서 국가가 타국, 타민족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자국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근대적 자유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이나 홉스는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의 자유의 관념은 합리적 국가와 시장경제에 의해 성립되는 새로운 문명사회의 출현이었다.

결국, 고대는 공공에서의 자유, 공공을 위한 자유가 근대에는 자유에서의 공공, 자유를 위한 공공으로 변화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자유사상은 자유주의와는 별개이며, 개인 사상은 개인주의와는 별개인 것이다.

 

 

 

 

 

 

47.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 형성과 몰락

 

 

 

1. 러시아의 사회주의 형성

 

 

세계 제1차 대전 후에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붕괴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경제적, 사회적으로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져 있었으며, 1차 세계대전 시작할 무렵부터 철강생산과 석유생산으로 세계 총생산량의 절반이 차지하면서, 대국이 되었으나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농노 해방령을 내리고 근대화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러시아는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사용하는 자재와 산업 진흥에 필요한 기계수입에 필요한 비용마련을 위해 곡물을 수출하자 국민들은 빈곤해지기 시작하면서 무거운 세금부과와 국가의 농노경작으로 인한 국민들은 정치 불신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러일전쟁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국민들은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나자 황제의 친위대가 민중을 향해 발포하여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후 제1차 러시아 혁명으로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에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 되면서, 노동자들은 시위와 폭동을 일으켜 자본가에게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였으며, 병사들도 폭동에 가담하여 무기까지 공급하였다.

이런 연유로 제2차 러시아 혁명인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황제 독제 체제라는 긴 역사는 무너졌으며, 황제 독재 하에서 불만을 품었던 정치세력이 결집해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정권을 잡았다.

빵과 평화를 원하는 민중의 기대는 사회주의 제창한 정당인 볼셰비키를 이끄는 레닌에게 집중되자 레닌은 민중의 사회인 소비에트에 권력을 집중시켜 전쟁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며 무력항쟁에 나섰다.

내부가 분열되어 불안정한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것이 10월 혁명이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이라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시적으로 시행하면서, 기업이 외국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농산물을 판매하도록 하여 자유롭게 돈을 벌도록 하였다.

레닌은 표면상으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내걸면서도 개혁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방침을 전환하여 사람들이 근로 의욕을 회복시키자 자본주의가 부활하면서 부유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레닌이 사망을 하자 소련의 실권을 잡은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을 부정하고 소련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중공업을 진흥시키고 농민에게 국유지를 할당하여 평등한 분배를 실현하였다.

 

 

2. 세계국가의 사회주의 몰락

 

 

세계의 오일쇼크 등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저성장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으면서 경쟁하지 않게 되자 품질과 기능이 향상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 산업에 생산력을 투입하자 민간은 물자 부족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낮은 생활 수준이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계급과 격차를 부정하고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정치적 지위에 따라 권한과 부수입이 남용되어 분배에 격차를 가져와서 실제로는 계급사회가 되어 사회주의는 실질적으로 내부로부터 붕괴가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헝가리 정부가 동쪽 지역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가고,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서독으로 입국했으며, 동독 국민들은 서독으로 망명방식으로 국민이 이동하였다.

결국, 동독 국민들은 서독으로 대거 몰려가서 베를린의 동서독 장벽이 무너져서 개방되었으며,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소련에서도 공산당 서기장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취임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재건, 재편)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로 강력한 개혁정책을 단행하였다.

 

 

 

 

48. 종교개혁 사상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 봉건사회의 동요를 배경으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을 기치로 십자군원정(1096~1270)과 동방무역의 부활을 계기로 성장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시작하여,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부패를 의식한 체제 비판에서 정치적 체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의 전통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리스도교적 고대 세계로의 희귀를 통해 봉건사회의 지배 구조를 타파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똑 같이 봉건사회의 붕괴를 이끌었다는 공통성은 있으나 두 운동의 내용과 성격은 정반대로 달랐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와 북유럽 중심의 종교개혁의 지역적 차이와 르네상스의 만능인의 이상과 종교개혁의 직업인의 이상은 후세에 서로 다른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이는 르네상스는 피렌체를 전형으로 하는 상업적 도시국가에서 성장하여 대상인과 황후 귀족층을 경제 기반으로 특권적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종교개혁 운동은 평범한 농민, 상인, 직업인의 광범위한 운동으로서 르네상스와 비교할 수 없는 사회학적 형성력을 가졌다.

 

 

2. 종교개혁 사상

 

 

종교개혁은 개인의 내면에서 우러난 정신의 변혁으로부터 생긴 역사적 사건이었다.

루터와 칼뱅 두 사람은 어떤 결정적인 개인적 체험(회심)에 의한 신과의 만남을 통해 개혁사상을 가졌으며, 둘의 사상이 종파로서 유럽을 양분하는 세력이 되어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 모두 신약과 구약성서 연구의 최대 수단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제도를 근본으로 되물었으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을 추구했다.

구약성서(기원전10~2세기)는 유대교의 성전이며, 그 원전은 히브리어로 쓰여 졌으며, 유대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 서사 시인이었다.

신약성서(1~2세기)는 원전은 그리스어로 쓰여 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록으로서 예수 사후에 제자들이 정리를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에서 사회사상의 역사에서 중대한 근본적인 사고방식은 1) 구약성서 첫머리의 창세기에 나오는 유일한 절대 신에 의한 세계와 인간의 창조라는 사고방식이다.

, 전지전능한 신과 비교했을 때는 인간은 하찮음과 무가치성, 신 앞의 인간끼리의 평등성, 인류최초의 남녀의 이익과 위락을 위해 창조된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이라는 인식이었다.

2) 창세기의 낙원(에덴동산)의 추방과 관련되어 아담과 하와는 물질적 부자유함이 없는 생활을 보내던 중에 하와가 뱀의 모습을 한 악마의 유혹에 금단의 과실을 먹고 신의 노여움으로 낙원에서 불모의 땅으로 추방되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주는 처벌을 부과했던 것은, 노동의 본질이 신의 처벌로서 괴롭고 고된 고통이라는 중대한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3) 원죄가 예수의 형사에 의해 속죄되었다고 하는 신약성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이 자연법칙과 상반되게 자유로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의 원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러한 근본적 세계관이 융합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신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제세할 수 있었다.

루터와 칼뱅은 자유와 공공성의 복잡한 관련성이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개인의 자유와 공화국의 자유를 덕이라는 정치적 공공성의 개념으로 결합시키려고 했다.

종교개혁의 사상에는 세속적 공공성의 의식적인 정당론이 부족하였으나, 루터는 이웃 사랑에 의한 세속적 직업의 도덕적 긍정이나 칼뱅의 자본주의 정신의 성립은 모두 종교개혁 사상으로 귀결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시장경제가 형성하는 사회적 질서는 가치를 가지지 못했으며, 시민의 덕과 맞서지 않았다.

결국, 루터에 의한 직업 관념의 확립이나 칼뱅의 자유로운 영리활동은 근대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질서는 종교적 의미에서 긍정되었다.

근대에서의 자유와 공공성의 관련을 종교영역 외부에서 정치와 도덕과 경제는 종교개혁 이후에 사회사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승해 나갔다.

3. 종교개혁 사상의 자유와 공공(결론)

근대 자유에 관하여 마키아벨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정치적 자유로서 정치지도자는 덕의 확립이 사상과제였으나, 루터와 칼뱅의 자유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자유이었다.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종교로부터의 자립을 자유로운 공화국의 실현을 추구를 했다.

루터와 칼뱅은 그리스도교의 원점회귀에 의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 교회로부터 자립과 해방을 추구했다.

두 사상운동은 결과적으로 로마교회를 정신적 지주로 하는 중세사회의 질서를 해체 했으며, 정치와 종교라는 별개의 방법으로 근대적 공공세계의 현상에 기여를 하였다.

 

 

 

 

 

49. 독립협회의 사상

 

 

 

1. 독립협회의 개념

 

 

독립협회는 민권보장과 국민 참정권에 의한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함으로써, 국민의 국가와 일체감을 가지기 위한 국민적 자각과 애국심을 기초로 한 국가자주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자주권에 의한 독립 국가를 추구한 민주주의 사상과 자강개혁 등에 의한 근대화 사상이다.

독립협회는 18967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위한 창립사업으로 서재필 등이 설립하였다.

 

 

2. 독립협회의 사상

 

 

1) 자주 국권 사상

 

독립협회의 자주 국권 사상은 국가의 자주, 평등 및 국가 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외세의 침탈을 막고 자주독립의 주권국가를 위한 민족주의 사상이다.

 

2) 자유 민권사상

자유 민권사상은 인권의 자유와 평등 및 국민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인권과 민권을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권을 수호하여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한 민주주의 사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 재산, 자유 등 하늘이 부여한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천부인권에 근거한 국민 자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3) 자강 개혁 사상

 

 

자강 개혁 사상은 열강에 의한 국권의 침탈을 막고 전근대적 압제체제로부터 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체제변혁을 통한 국가체제의 근대화 사상이다.

 

. 정치적 면에서는, 전제군주체제를 입헌제의 군주체제로 전환시키고, 인권과 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추구하였다.

 

. 경제면에서는, 농업 경제체제를 근대적인 산업 경제체제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 농업편중의 경제구조를 개편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상공업, 광업, 농업, 어업 등 각종 산업개발을 위한 실업교육을 강조하였다.

 

. 사회적 면에서는, 전통적인 양반사회체제를 근대적인 시민사회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양반제도, 노비제도,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차별적인 신분제도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철폐 운동했다.

 

. 문화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인문 교양 문화 체제를 근대적인 과학 기술 문화 체제로 전환시키려고 신교육 실시, 신지식의 보급, 학교 교육을 중시하였다.

 

. 군사적인 면에서는, 치안유지 체제를 자주국방 체제로 전환시켜, 외국의 무력침략을 막기 위한 군제 개편과 무력 증강의 강병책을 중시하였다.

 

 

3. 결론

 

 

독립협회는 정치집단을 통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사상으로서, 애국 계몽운동이었다.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후, 외국의 내정간섭은 국가의 자주권의 손상을 방지키 위한 국권수호와 국토수호 운동이었다.

독립협회는 국가의 재정권을 외국인에게 지키기 위한 인권수호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인권보장 운동이었다.

독립협회는 언론의 자유 투쟁으로 국민의 참정권과 정치적 변혁을 위한 운동이었다.

결국, 독립협회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근대화운동으로 일제의 주권침탈과 식민지 통치과정에서 항일독립운동과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50. 정토사상(淨土思想)

 

 

 

정토사상은 부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의 실현을 추구하는 제반 논리와 방법을 말한다.

이런 신앙은 선종과 같은 자력 신앙과 비교하여 타력 신앙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토란 예토의 반대 개념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정토는 극락을 말한다.

정토사상의 불경은 약 650 여부의 대승경전 중 200 여부나 되어 대승불교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토의 경전 중에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은 정토사상의 근본 소의 경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정토사상은 신라의 원효, 태현, 신방, 경흥, 현일, 의적 등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정토사상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여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할 목적으로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는 불교의 일반적 사상과 다른 점을 나타내었다.

불교의 강력하게 대두되는 극한 상황적 의식으로서, 어려운 현실사회의 괴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정토사상은 극한 상황에 처하여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는 법부를 의식하고 출발한 대승불교의 독특한 결실이다.

정토사상의 중심과제는 정토와 왕생에 있으며, 정토란 부정잡예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로서 즐거움이 충만 된 극락세계를 가리킨다.

모든 중생은 불타와 같은 일체지를 얻어야 함에도 우리들의 환경과 생활의 여의치 못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되지 않는 것이 없는 모든 유혹과 번뇌가 끊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정토사상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왕생은 예토에서 정토로 갓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토왕생은 인간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죽음 이후의 일도 제시되는 동시에 방위가 논하여 졌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는 지방입상적인 정토설은 용납되지 않고, 반야개공, 일체불가득의 견지에서 볼 때, 정토장엄이나 사후왕상 사상은 표현 그대로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정토사상은 정토의 왕생을 목적으로 하여 달성을 위한 방법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고 있다.

정토왕생은 원시불교의 생천설에 기원을 두지만, 그 방법은 부처의 본원력에 의할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본원이란 부처의 발심 때 세우는 속에는 자신의 깨달음을 실현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도 깨달음을 얻게 하는 이타적인 서원이 동시에 있다.

정토사상의 목적은 정토왕생에 있고, 극한상황에 처한 범부에 가장 알맞은 길은 제18원의 내용이며, 임종과 같은 극한 상황이라도 10념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는 한국 정토사상의 전성기로서, 7,8세기경 정토사상을 논한 사상가는 자장, 원측, 원효, 의상, 경흥, 의적, 태현 등으로서 정토사상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신라시대는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달성을 위한 전환과 사회적 불안은 신라에 미타정토 사상을 전개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정토사상은 기화와 보우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으며, 기화는 배불에 대한 불교의 바른 이해를 위한 헌정론, 원각경도 등 많은 저술로서 조선 초의 학승이었다.

정토사상은 마음은 영원하지만, 몸은 멸하는 것으로서 영혼설에 의한 서방정토를 설 하였다.

이는 마음이 곧 정토요 자신의 성품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사상적 견지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정토사상은 휴정을 분기점으로 하여, 휴정은 꺼져가는 불교를 중흥한 조선조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시대의 보우는 전책적인 면에서 불교의 중흥에 노력하였지만, 휴정은 정책적인 면뿐만 아니라 불교학의 중흥에 큰 공헌을 한 대표적인 불교사상가이다.

휴정의 정토사상은 조선 후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성총, 도안, 응윤, 각안 등 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51. 자유주의의 기본원리

 

 

 

1. 자유주의 의미

 

 

자유주의 의미는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하다는 근대사회사상으로서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사상이 아닌 시민사회의 시민정신이다.

자유주의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은 사물에 대한 인식과 사고능력 부족으로 도덕적인 면에서 과욕으로 인한 불안정하지만, 동물과 달리 이성과 양심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주의는 누구나 불안정하여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당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2. 자유주의 기본원리

 

 

자유주의 기본원리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억압을 받을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신분, 인종, 종교, 성 등에 대한 개인의 인격과 인권은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법 앞에 평등하여 차별을 받지 않는 법치주의 기본사상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개인 누구나 평등하여 교육, 직업, 사회활동 등의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이간의 평등사상은 법과 제도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유주의 정신이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기본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연유는, 자유주의 기본입장은 개인주의로서 인간의 가치를 중요시 하므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협의 개념이 아닌 개인의 생명권과 재산권 등 모두 포함하는 인권(human rights)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 중심주의이지만, 이기주의(egoism)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개인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탐욕적인 욕심으로 타인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지만,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는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하여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완전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는 법과 제도적 범위에서 무제한의 자유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범위에 적용된다.

, 법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것은(Locke) 법치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자유주의 원리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 자신만의 책임과 권리로서 독립적인 자립정신이다. 또한, 경제 상황에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경제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함은 자유주의 기본원리이다.

자유주의는 생각의 자유로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가지며, 이는 표현 및 비판의 자유와 더불어 언론 출판의 자유를 포함한다.

특히,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의 자유는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며,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에 기여 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비판의 자유는 절대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용(tolerance)이 있어야 한다.

문명사회에서는 건설적인 비판과 관용이 가능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유주의는 유럽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과정에서 종교와 정치의 자유 및 신분제도 철폐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부르주아들 자신의 자유와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고, 신분 차별이 없는 사회적 평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통한 정치권력 제한 등의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원리와 직결되었다.

서구의 정부들은 중상주의 정책 일환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강력한 경제통제에 대한 철폐를 위한 경제활동의 자유를 주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가 생성되었다.

 

 

3. 결론

 

 

자유주의는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보장을 중시하는 사상이며,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평등, 개인 기본권보장, 사상과 비판의 자유 및 관용이 기본원리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보편타당성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실천하기 위한 제도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개인 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통제의 관행을 버리고, 효율적인 자유 시장경제를 위하여 경제규제를 대폭적으로 축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52. 자본주의에 관하여!

 

 

 

1. 서 언(序言)

 

 

자본주의(capitalism)의 발생 근원(根源)(1760~1830)은 최초로 영국에서 증기기관 기술, 기계공업, 철강업 등 기술혁신으로 인한 조직과 경제체제를 가지고 산업부문에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일으킨 영향으로 영국, 서유럽, 북아메리카 등에서 자본주의가 발전되었다.

자본주의 시발점은 1776년 영국의 현대 경제학의 시조인 Adam Smith의 국부론(國富論)에서 부의 원천은 무엇이며, 부의 증대를 위해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이 무엇인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설명했다.

자본주의라는 어원(語原)1821년 영국의 James Mill이 영국의 경제체제를 규정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2. 자본주의(資本主義) 내용

 

 

1) 자본주의(capitalism)

 

(1) 자본주의 개념과 정신

 

자본주의 개념과 정신은 Edward Kearny는 끊임없는 자기 향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를 노력하여야 하며, 물질적인 성공은 근면과 자제를 바탕으로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남모르게 각종 욕망을 자제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영광은 자신과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했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것은 자기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인격 형성에 필요한 박애주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2) 자본주의 함축된 의미

 

자본주의의 함축된 내용은 자유 시장경쟁을 통한 생산, 유통, 소비 체제를 이상으로 하여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 하려고 한다면, 모든 자원은 가장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재산자체가 소득에 대한 요구권을 가지며 그것이 시장경제에서 실현된다고 보며, 개인의 권리보다 소유의 권리를 우위에 두고 있으며, 경제적 평등보다 경제성장으로 빈부의 양극화를 감소시킨다고 본다.

 

(3) 자본주의 발전단계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발전 단계를 Michel Albert3단계로 분류하면서, 1단계 1791년부터 시장경제가 정부와 부딪치는 자본주의, 2단계 1891년부터 정부가 시장경제를 길들이는 자본주의, 3단계 1991년부터 정부의 일에 시장경제가 나서는 자본주의로 분류했다.

 

(4) 자본주의 특징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내부 질서를 유지하면서, 기업 간의 치열한 경쟁은 눈에 보이지 않게 서로 감시와 규제하는 자동 감시 장치, 자동 규제 장치가 생긴다.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를 무시하고 수요공급의 법칙을 무시하면, 시장의 보복을 받으며, 특히, 시장경제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충분하면서 싸게 만들며,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도 불균형을 자체 조정하며 혁신과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

, 시장경제는 자율규제, 자율 감시와 유도장치가 기업 상호 간의 경쟁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Adam smith가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The principle of invisible hand)은 기업이 치열한 경쟁으로 사익을 추구하면, 국익이 늘어나게 된다. 이는 정부의 지시나 통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일제강정시대의 경제가 식민지로 예속되어 있어 수탈되어 왔던 것처럼, 정치가 주인이 되어 경제를 마음대로 하였지만, 지금은 기업가가 사회의 주인이 되어 정치의 족쇄에서 벗어나 민간부문 경제가 되어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5) 자본주의 장단점

 

. 자본주의 장점

자본주의 경제의 장점으로는 국민이 원하는 상품만큼 가급적 값싸게 생산하는 기술혁신으로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

시장경제에 필요한 수요공급의 상품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정부가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자유 시장경쟁을 통한 생산유통 소비 체제를 이상으로 하는 개인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자본주의 단점

 

자본주의 경제의 단점으로는 상품의 생산과잉으로 인한 경제공항과 산업기계화에 따른 실업인구의 증가로 부의 편중 현상이 생기며 자본주의 불평등체제가 형성된다.

이는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어 사람을 지배함으로써,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로 인간의 소외와 적대감을 형성시키는 단점이 있다.

 

(6) 자본주의 국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체제의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국가는 18세기 중엽부터 영국, 프랑스 중심이 되었으며, 19세기 산업혁명 후에 독일과 미국 등으로 파급되어 오늘날은 한국은 물론 포르투갈, 스웨덴, 필란드 등 자본주의 형태의 국가들이 있다

 

 

3. 결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사상이나 정책은 서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결론이다.

1867Mark자본론에서 자본가가 지배하는 국가의 자본주의 사회는 필히 붕괴되어 사회주의 사회로 도래한다고 주창(主唱)했다.

현금(現今)까지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복지국가로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Mark의 주창이 허구로 입증된 예를 들어본다.

1991년 소련의 공산주의가 패하여 붕괴되어 공산주의가 종식됨으로써,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또한, 1970년 중국문화 대혁명의 후유증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1979년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한 후에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을 주창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중국발전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더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인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서진 복지국가들의 정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 요소가 가미되었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서 사회주의가 아닌 복지국가형의 수정자본주의로 전환되었다.

수정자본주의(Revised Capitalism)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고 시장경제의 실패부문인 빈부격차, 실업, 독과점의 횡포, 공황 등을 시정 .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적절하게 역할을 하는 경제체제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혁하지 않고 일부 원리를 수정 또는 개량하여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말하며 사회주의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1929년 발생한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이 매우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F.D Roosevelt에 의해 뉴딜정책(New Deal Policy)으로 경제구조에 정부가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대규모의 국가토목사업인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를 막대한 세금을 바탕으로 실시했다.

한국 또한 20084대강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세계불황 시에도 플러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본다.

이러한 수정자본주의의 문제시 되는 것은 국민의 막대한 세금으로 충당하여 운영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나치게 기업의 간섭으로 경제활동을 위축시켜 생산력과 경쟁력의 저하의 요인이 되고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세금부담으로 시장경제의 침체현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 국가인 베네수엘라는 세계 석유매장 1위 국가였지만,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포풀리즘(Populism) 정책을 실시하여 무상복지, 부동산정책 실패, 세금폭탄, 노동자 임금 상승으로 국가의 재정이 바닥났으며, 더욱이 기업이 국내에 투자를 하지 않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데다가 유가하락 등으로 경제위기에 봉착하여 국가가 망했다.

그리스 또한 정책적으로 공무원 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무작정 늘려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충당하다보니 국가가 경제적 파탄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강성노조로 근로자들의 요구사항인 임금 상승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에 이를 해소하기 위한 포풀리즘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가의 경제적 위기 상태에 빠진 국가이다.

현재 우리나라 또한 수정자본주의의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현실에서 필자 또한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부담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나라의 자본주이 정책은 무한 복지정책인 사회주의와는 서로 양립(兩立)하여 존재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를 수정 . 보완하여 수정자본주의(Revised Capitalism)의 국가로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

 

 

 

53. 자유와 자유주의에 관하여!

 

 

1. 자유의 의미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지금은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듯이, 인간은 점점 더 자유롭지 못해가고 있다고 주장을 했다.

반면, 액턴 경은 자유란, 자연의 속박에서 자유로움, 질병과 굶주림과 무지와 미신에서 자유로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루소의 자유는 정치적 제도에서 자유로움으로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낭만적인 자유라고 했다.

또한,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의 정책목표로서, 자유를 공포에서 벗어날 자유, 결핍에서 벗어날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라고 선언했다.

오늘날 경제적 자유라는 표현은 자유경제 체제에서 국가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경제체제라고 칭하거나 개인이 경제적 억압에서 자유로움을 의미하며, 종교적 자유는 국가의 간섭에서 종교제도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속박이나 장애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을 경우에 자유로운 것이다.

예를 들며, 허가나 금지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나 기분에서 마음껏 만족시킬 기회를 갖는 경우에 자유롭다고 느끼게 된다.

자유는 영어의 용법에서 freedomliberty라는 말은, 서로 전용이 가능하며, liberty는 정치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freedom은 철학적이거나 일반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2. 자유주의 의미

 

자유를 믿는 자유주의자는 자유라는 의미는 나라마다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최초 자유주의 철학자 로크는 언어의 본질, 용법, 의미를 고찰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지식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라스크의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정치적 견해를 의미했으며, 할로웰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최고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념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이었으며,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세계관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했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는 개인을 윤리적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국가는 수단으로서 개인의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국가의 속박에서 개인이 자유로울 것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의 로크의 자유주의는 자유의 원리를 국가의 속박에서 자유로움을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공통된 본질적 원리라고 했다.

국가 중심주의적 자유주의자는 개인이 국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독일의 전통적 자유주이는 자연권이라는 관념에서 자연법은 인간의 본성 자체의 권리로서 실정법 또는 군주의 법보다 상위의 법으로 이해를 했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분야인 무역의 자유에서 정치적 분야인 피치자의 자유이었다.

결국, 영국의 자유방임주의로서, 경제적 인간에 대한 요구로서 국가는 교역상의 이익을 위해 기능을 발휘해야 하며, 프랑스의 계몽주의의 인도주의로서 국가가 공동의 복지에 대한 봉사자로 기능을 다하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요청한 것이었다.

 

 

 

 

 

54. 자유방임주의란 무엇인가?

 

 

 

자유방임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국가의 간섭과 보호가 필요 없는 경제적 조건과 이성, 자연 질서,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자연법사상이라는 정신적 풍토에서 출현하였다.

18세기 영국은 산업자본주의로 인한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대외경쟁에서 산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낡은 제도 등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도제제도, 노동자의 이동을 제한하는 거주법, 상인의 특권과 독점을 인정해주는 국가의 통제와 간섭 등이 자유로운 산업발전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간사회에는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자연법사상에서 아담 스미스는 자연적 자유 제도론과 자연 질서론을 주장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므로, 각 개인은 스스로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는 가장 적합한 이기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도 타인의 행운에 대하여 동정이나 공감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이기적 동기는 정의로서, 개인의 인격, 생명보호, 재산안전, 개인의 권리보호를 의미하고, 인간의 신중함은, 절약, 근면, 분별, 주의 및 사고에서 나타나는 습관으로 개인의 행복을 확보해주는 배려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이기적 경제활동을 신중함의 덕과 결부시켜, 경제행위에서 정직, 근면, 절약, 공정을 강조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각 개인의 활동의 총화는 그대로 사회의 공공적인 일에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조화로운 자연 질서가 국가의 인위적인 제약으로 깨뜨려지고 있으므로 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최소한으로 줄어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대외적 안전과 국내적 질서를 유지하고, 그대로 자연적 법칙에 따르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국가가 간섭하는 경우보다 더 행복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자연적 조화를 이루도록 인도된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리에 충실함으로써, 사회적 공공선으로 최대한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자유의 핵심은, “국가로부터의 자유에서, 기본적 인권(시민적 자유)에서, 참정권(정치적 자유)으로 발전하면서, 초기적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 내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으로 자연법사상을 반대하는 벤담은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는 국가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국가권력에 대한 관계가 적극적임을 의미할 뿐이며, 국가권력의 최소의 기능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을 의미한다는 자유주의의 명제가 그대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55. 한국 중용사상의 양태

 

 

1. 서언

 

중용사상은 모든 것이 충돌하여 결정하는 데 있어 중간의 도를 선택하는 현명하고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 외에도 인도와 서양에서도 있으며,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플라톤은 어디서 그치는지를 알아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로서의 양적 측정에 아닌 질적 가치를 중용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이 참다운 덕이라고 파악했다.

여기서 한국의 유학사상에서 중용의 의미로서 이이와 정약용의 중용에 관한 사상적 양태를 언급하고자 한다.

 

2. 중용의 의미

 

중용의 의미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의 하나로서, 유교사상 자체 내에서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뒤 밭침 되어 있다.

중용에서 중은 양극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으로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이며, 용은 시간적으로 변하지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내용과 실천적 의미

 

중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나 그에 따라 의로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중은 객관적인 대상 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4. 중용의 철학적 의미

 

중용사상의 본체론적 심성론적 논리에서 주자는 성정에 대하여 중화를 말하며 중을 도의 체이며, 화를 도의용으로 보았다.

중용의 숭고한 도는 성인만이 능히 실현할 수 있으나, 군자의 중용의 도는 비현실적인 도가 아니며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므로 중용의 도는 일상생활의 전역에 걸쳐있다고 했다.

 

5. 중용의 현실적 의미 (결론)

 

도가와 불교에서는 대체로 고상한 이상만 추구하여 무위자연이나 무욕으로 인간본성의 선한 측면만 보았다.

그러나 중용은 이상과 현실의 가장 바람직한 조화를 의미한 것이었다.

중용사상의 현대적 의미는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학이나 주관적 진리를 몰두하는 철학은 각각 이상과 현실의 결여와 무시로 인한 괴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실정에 있다.

 

 

 

 

 

8.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

 

 

1. 개념

 

일상생활에서 목적의 체계와 윤리의식 내지 윤리적 태도로서, 실천적 행동의 가치관과 당위 의식으로서의 가치관을 말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개인의 차이가 있지만, 사회공동체로서의 가치관은 유사성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으로서의 가치관은 일반적 경향은 시대에 따라 변화는 가운데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서 문헌이나 일화 또는 전설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2. 전통적 가치관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은, 1) 가족 중심적 2) 출세를 통한 가문의 명예, 3) 삼강오륜 등 도덕률로서 명예롭게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개인 또는 가풍에 따라 행동 경향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 서민층의 경우 행동적 실천에서 부류, 즉 물심양면으로 안정된 삶이며, 특권층의 경우 기본적 욕구는 같으나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한 물심양면의 안정을 얻는 것이었다.

다음은 부류 가치를 추구하며,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명예롭고 깨끗한 삶을 가지는데 가치를 두었다.

우리 조상들의 당위 의식의 가치관은 부류에 대한 소망과 추구는 서구인들보다 강했으며,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는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는 전통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농공상의 직업인들은 천대를 받았으며, 생산과 물질의 가치를 과소평가 했으며, 학문과 도덕을 비롯한 정신적 가치를 숭상하는 기풍을 더욱 강조했다.

유교사상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는 도덕성을 강조하고 효성, 충성, 고결, 지조, 겸손 등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다.

남자의 경우 투쟁적이며 야망적인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겸손하여 선비형의 인물을 높이 평가했다.

여자의 경우 효성과 겸손 등 남자들과 공통으로 숭상된 덕목 이외 여성만을 위한 덕목으로 정절, 현숙, 순종, 근면 등 부덕이 강조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가친척끼리 한 고장에 모여 살아서 가족주의적 사고와 행동의 경향이 강했으며, 가치관은 윤리관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3. 가치관의 변화

 

19세기 말부터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농경사회와 유교사상의 배경으로 형성된 전통적 가치관은 변화가 되었다.

우리나라 광복의 계기로 새로운 시대에서 사회의 양상은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주의 중심의 전통적 가치관은 남아 있고, 반면 서구적 산업사회의 새로운 가치관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전통적 가치관과 외래의 서구적 가치관의 갈등이 생성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로 사회갈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세대 간의 갈등이 생기면서, 현대 한국인의 대부분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의 영향이 받아들어졌다.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의 갈등 문제를 양자 택일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현대 산업사회에 팽배한 물량주의의 가치관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폐단을 가져왔으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신적 가치의 우위성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리고 현실적 문제를 적절하게 대처하며, 정신적 가치 내지 인간적 가치의 우위를 지키고 인간답게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여야 한다.

 

 

 

 

 

59. 한국 실학사상

 

 

 

1. 실학사상의 생성 배경

 

 

한국의 실학사상은,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유학운동을 말한다.

실학의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그 내용과 용법에서 다르며, 성리학도 실학이라고 칭하지만,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삼강오륜적인 사회윤리사상과 왕도적인 통치술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실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기 실학은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조선조는 16세기에서 자체 내의 모순과 폐단을 드러낸 것은, 농촌에서 부농과 빈농의 차이가 격심하였으며, 도시에서는 고리대금업이 팽창하여 빈부의 격차가 심하였다.

더욱이 권력투쟁이 치열하고 양반층이 증가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으로 인한 사회는 혼란해졌다.

따라서 사회의 전면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며, 지배층 및 성리학자들은 형이상학적 탐구나 예설의 집성과 세목화에 관심이 있었다.

결국, 주자학의 토대 위에 명분주의와 형식주의적 경향이 강하여지자 사회적, 사상적 분위기에 성리학의 비실제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학이라는 학문적인 흐름이 생성되었다.

 

 

2. 실학사상의 내용

 

 

실학사상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의 정신이며, 그 실천을 위해 원시 유학의 현실적 태도 회복과 고증의 방법 등을 강조하였다.

실학은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점에서 성리학고 구별되는 방법론적 특색의 하나이다.

실학자들은 이수광, 유형원, 박세당, 이익,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이 있다.

경제지용은 이익을 대종으로 하며, 토지제도나 행정기구와 같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용후생은 박지원 중심으로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기구의 발전 등 기술면에서 혁신을 강조하였다.

실사구시는 경서, 금석문, 전고의 고증을 김정희에 의하여 위주로 하였다.

실학의 기본정신의 하나는 박학정신으로 백과사전적인 저술을 많이 산출하였으며 매우 복합적인 학문체계를 이루었다.

실학은 성리학을 극복하여 실제성을 추구하기 위한 정신을 관철시키고자 사장학, 고증학, 경세학, 의리학 등 다양한 분과학을 포괄하는 복합체 구조로서 실학의 하나의 통일적 학문체계로 간주되었다.

 

 

3. 결론

 

 

실학의 세계는 근대적인 성향으로서, 사실과의 일치 여부를 중시하며, 근대 과학적 이었다.

실학은 양반의 가식과 횡포를 폭로, 비판하면서, 신분차별과 직업차별을 타파하는 근대적인 인권과 평등의식이었다.

실학은 소수 양반귀족의 사유지를 국가공유 혹은 농민소유로 환원시켜 농민의 토탄에서 구해내려는 전제 개혁이었다.

실학은 실질 내용보다 명분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던 성리학을 비판하고, 경험주의의 인식론과 공리주의적 사회, 윤리관을 주장하는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을 제시하는 사상이었다.

 

60. 유교 사상의 특징과 종교성

 

 

 

1. 유교 사상의 특징

 

 

유교는 공자의 사상의 배경으로서, 인간관, 세계관 등이 함유하고 있으며, 은주시대(殷周時代)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공자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고, 또는 천명에 신념과 외경심을 표시하였으며,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그 뜻을 행하는 궁극적 존재로 묘사하고, 인간은 천의 뜻에 따르는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를 천명사상에 두고 있다.

공자의 사상은 은대의 상고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문화와 주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예제문화를 거쳐서 이를 배경으로서 하여 성립된 초인간적인 형이상학적 요소와 현실의 사회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견실성을 볼 수 있다.

공자의 인간관의 핵심은 인사상(仁思想)으로서 인은 인간의 본질이며, 본연의 삶의 그 자체인 것이다.

유교는 일반적으로 윤리 도덕의 규범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교적, 철학적, 예술적, 윤리적, 교육적, 정치적, 법률적, 제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을 본질적으로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는 종합적이며 총체적이지만, 특정 학문분야로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유교의 종교성

 

 

유교를 종교적 측면에서 그 내용은, 경전 사상에서 볼 수 있으며, 은주시대에 걸쳐서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와 천은 시경, 서경, 오경 속에서 볼 수 있다.

상제와 천에 대한 신앙이 상고에서는 유사하였으며, 주대에서 천사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상제와 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이며, 공자는 천의 권위에 대한 손상도 없이 천명사상을 통해 신성성과 구주성을 인간에게 내재시켰다.

공자는 천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을 보여줌으로써, 천의 존엄성을 결단코 비하시키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하늘의 문제를 인간의 삶의 형태 속에서 수렴시키고, 인간행위를 떠나 별도로 상념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지 않았다.

천명에 대한 응답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이며, 일체의 종교의식 또는 제의는 경천행위의 강조이며 강화를 위한 단함이었다.

공자는 체제나 교사지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사를 중요시 하였으며, 제사로서 나타나는 제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이며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유교의 근본 사상은 인간의 삶이 외형적 형태적 관계에 국한되고, 현세에 있어 인간의 삶을 충실 하는데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서는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공자는 초인간적인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표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수도하는 스스로 도리를 다할 뿐이지,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이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으며, 인간은 인간다움으로서 도와의 일치가 궁극적 목적으로 하였다.

공자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였으며, 인간 생명은 인격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성취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나 스스로 본분을 다하는 것이 평화와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관계는 인격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인격적인 관계가 일탈된 상태에서는 인간관계가 완전히 정립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참된 인간관계는 사랑과 존경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건적이고 비 본래적이며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상업정신으로 전략한다는 것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 객관적 존재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세에 살아 있는 이들의 진실성이 문제라고 했다.

살아 있는 부모형제에 대해 애경심을 가지는 것과 같이 죽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기와 같이 하고 내가 직접 제사하지 않으면 제사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효도는 조상뿐만 아니라 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숭앙심으로 승화되는 것이므로 유교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교화 방법은 경전 중심으로 할 뿐, 어떤 종교적 교리를 만들어 신앙의 방식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들지 않았으며, 민간인가 구별하여 예배를 주관하는 승려나 사제를 두지 않았다.

공자와 제자들은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로서 대성전과 같은 태학과 향교를 설치하여 성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터전으로서 서원을 세웠다.

이는 종교적 사원이나 집단적으로 예배하기 위한 종교적 조직체라 할 수 없었으며, 다만, 유교의 정신을 숭앙하고 계승 발전시키는데 한 몫을 차지했었다.

성균관과 향교는 국.공립이고, 서원은 사립기관으로서 그 운영은 선비에 의해서 운영되었으며, 사제나 승려와 같은 일정한 신분을 가지지 않았다.

유교는 혼인도 하고, 평상인으로서 생활을 유지 하면서, 인간의 범상한 생활자체를 중시하고 고양시키고자 했다.

유교는 인간의 순수정신적인 세계를 존중하고 인간의 삼성적 요소와 삶의 현장을 중요성을 인정하고, 잘못되지 않게 주의하며, 부정을 금지하며 알맞은 상태를 조절하여 중화를 다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순수 정신의 확립과 감정의 순화로 인격 주체를 이루고, 가정의 질서와 행복을 성취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민생을 보양하고 교화를 위한 기반으로 인도주의 국가의 건설과 기강과 질서를 세우고 인륜을 가르치며 의식주를 제공하기 위하여 행전체제를 세웠다는 것이다.

공자 스스로 도를 행하고자 철환천하 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와서 도를 밝히고 인제를 양성하였다.

 

 

 

 

 

61. 개인 자유의 중요성에 관하여!

 

 

 

행복한 삶에 있어 개인 자유가 왜 중요한 것인가?

일상생활에서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으면 인간의 지적 발달과 그를 통한 도덕적인 생활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개인이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자신이 책임을 지는 한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체 물리적, 도덕적 방해받지 않고 각자 개인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 행동에 대하여 책임진다는 단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무제한 자유를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강압적인 통제받을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간섭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남들을 괴롭히지 않는 범위에서 스스로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면, 자신의 책임 아래 남의 방해받지 않고 자신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는 허용되어야 한다.

개인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서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유익하듯이, 각자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는 개인과 사회발전에 연관이 된다.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허용범위 한계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정치권력의 관계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정치 지배자의 압제에서 보호받거나 피지배자들이 저항이나 반란의 자유를 정당화했다.

오늘날 개인의 자유는 사회가 법에 따른 강제나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경우는 최대한 엄격하게 제한할 수 있는 범위를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들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여 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에 반해 권력사용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를 사회나 권력자들이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통념과 달리 자신들의 생각과 성향이 맞추려는 지나친 제한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독재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 자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사회적 정치적 권력에서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여야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62. 자유권(自由權)에 관하여!

 

 

1. 개념

 

 

자유권은 국가가 국민에게 위법한 명령을 하거나 강제하는 하는 경우 소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작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생존권은 국가에 대하여 급부, 이익의 작위를 요구할 권리이며, 생존권은 국가에 의한 자유이고, 자유권은 국가로부터 자유인 것이다.

 

2. 자유권의 배경

 

헌법상 기본권으로 승인, 보장된 예는 버지니아권리선언, 미국독립선언, 프랑스 인권선언 등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가인 서독, 일본 등에서 자연법사상이 부활되고 자유권을 자연권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3. 자유권의 법적 성격

 

자연권설의 자유권은 국가와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무제한 전국가적, 초국가적인 개인의 자연의 법칙이라고 보았다.

실정권설에서는 인간의 자유는 전국가적일 수 있으나, 권리는 국가내적인 것으로 보아 자유권은 실정법상권리라고 본다.

권리설은 자유권이 진정한 권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으며, 반사적 이익설은 법률에 규정하지 않는 자유만이 인정된다는 의미에서 자유권은 반사적 이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권리설(공권설)은 자유권은 소극적이기는 하나 국가의 위법적인 침해에 대해 배제를 청구할 수 있는 반면, 일정한 구제수단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권리설이 다수설이라는 것이다.

 

 

4. 자유권의 범위와 분류

 

1) 정신활동의 자유 기본권은,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보호 자유이다.

2) 신체의 자유 기본권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이다.

3) 경제적 자유 기본권은 직업선택의 자유, 재산권의 자유와 보장 및 한계, 소비자의 자유와 권리보호 등이 있다.

 

 

 

 

 

63.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나는 자유롭다는 말을 할 때, 자신의 어떤 생활에서 속박이나 장애에 대한 부담에서 풀려났다는 의미를 뜻할 것이다.

개인의 허가나 금지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욕망이나 일시적 기분을 마음껏 만족시킬 기회를 가졌을 경우에 자유롭다는 생각과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군대생활의 특유한 속박에서 헤어나서 자유로움을 느낄 경우일 것이다. 또한, 나는 빚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젠 빚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흔히,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의지의 완성이니, 저항의 부재를 의미하느니, 정신의지를 실행하는 능력 등이라고 하였다.

자유란 능력을 말하는 집단과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집단이라는 경우에, 자유를 능력이라는 견해는 자유를 능력 또는 힘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도덕철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속박의 부재라고 보는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속박의 부재라고 보는 견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때그때 욕구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자유에서 흔히, 방종이라는 것은, 비이성적인 욕망과 정열을 향한 탐닉과는 현저하게 대립되는 것과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자유란, 많은 가능한 속박이나 부담 중, 어느 하나와 대립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자유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비이성적 지배의 부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비이성적인 것의 침해를 이성적 능력으로 좌절시키는 것은 자기 규율, , 이성의 고유한 권위를 유지함으로써, 실현이 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자유의 지배는 이성, 양심, 정신, 지성에 의한 지배라는 것이다.

자유에 관하여, 영어로 표현하면, freedom더 높은 자유를 나타내고, liberty더 낮은 자유라지만, 사실이 아니며, 영어의 용법에서 freedom이나, liberty말은, 서로 적용이 가능하며, liberty는 법이나 정치의 문맥에 사용되고, freedom은 철학적이거나 일반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결국,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자발적 행동은 자신이 내린 결정과 행동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 이루어진다면, 자발적 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원인이 외부적 상황이나 행위자의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면, 이러한 행동은 강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외부로부터 비난이나 처벌이 따르게 되면 그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에 관해서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하여야 할 한계가 있다.

현대적 자유에 단일적 개념은 행위자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또는, 무엇이 되거나 되지 않는데 가해지는 어떤 제약이나 제한으로부터 자유가 항상 문제시되어 왔다.

인간은 내면적 제약에서 벗어나면, 내면적 자유를, 외부적 제약에서 벗어나면, 외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인간은 이성으로 자신을 지배해야만 하는 것이지, 쓸데없는 욕망에서 벗어나면, 내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의 명령이나 사회의 관습을 자신의 이성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이것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므로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야 내면적 자유를 함양할 수 있다.

자유는 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동의하여야 하며, 복종하여야 하는 제약이 따르게 된다.

 

 

 

 

 

64. 자유와 권력에 관하여!

 

 

 

자유의 개념

 

 

자유(liberty)와 자유로움(freedom)은 두 가지 개념 혹은 방식이 있다고 벌린(Berlin)은 말했다.

부정적 자유(Negative Liberty)는 인간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 또는 정부의 강압 없이 누릴 수 있는 영역이나 구역이다.

긍정적 자유(Positive Liberty)는 개인 스스로가 분별력 있고,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며, 자신 생각과 목적들을 참고해서 그 선택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정도까지 자유로우며, 그렇지 않다고 깨닫도록 만들어진 정도까지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도록 강제하는 일이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벼린)

영국의 철학자 그린(Green)은 진정한 자유의 이상은 인간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권력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독재자가 가장 사악한 억압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진정한 자유는 그 누구도 자신을 자기식대로 행복해지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했다.

 

 

2. 자유와 권리

 

자유는 모든 사람이 권위와 다수의 사람, 관습과 의견의 영향력에 저항해 자신의 본분이라고 믿는 행동을 하면서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했다.(Acton)

자유로운 사회는 보편적인 표현이 가능하고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여론이 영향력을 가지고, 약자를 보호하고, 적절히 보장된 의식의 자유가 나머지를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 역사가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된 역사라고 했으며, 어떤 국가도 정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계속 승자의 자리에 권력을 가지고 머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국민주권과 법의 지배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지만, 법의 지배가 언제나 훨씬 더 강력한 자유 체제를 제공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가 명백하게 민중의 의지라는 힘 의해 쉽사리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온전한 참정권을 갖춘 민주주의라도 견고한 헌법과 법률이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견고한 헌법과 법률은 원하는 것을 믿고 운하는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강화하고 보존하는 한 바람직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는 투표하는 것은 공허한 행위가 된다.

 

자유는 그 자체도 가장 고귀한 정치적 목적인 것이다.”

 

 

 

 

65. 자유주의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

 

 

 

자유주의의 개념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평등에 관한 어떤 믿음으로서, 하나의 정치 철학이며, 개인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정의의 중심적인 요건이다.

자유주의는 각자 개인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을 사회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의이다.

자유주의는 각자 개인에게 다른 사람들이 사회적 안정, 경제적 효율성, 더 좋은 문화를 위해 희생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불가침성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정부를 무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불신하는 경향이 있으나, 극도로 관용과 극도의 평등을 내세우게 된다.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이 극도의 평화와 자기 결정에 책임을 지내면서,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극도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각 개인이 자신 삶을 어떻게 전개할지 결정할 수 있어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정부가 시민을 부모가 자녀를 대하듯이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각 개인의 이웃을 존중하려면 각각 개인들이 자신의 결정으로 일어서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자유주의자의 유형

 

 

자유주의자의 유형은 정치 철학을 포괄하는 용어로서 분류한다.

1) 고전적 자유주의자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최초의 자유주의자들로서, 사상가로는 19세기의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존 로크, 해리엇 테일러 밀, 데이비드 리카도와 20세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제임스 뷰캐넌, 밀턴 프리드먼 등이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사회, 강력한 시민권, 강력한 경제적 권리 및 재산권, 개방된 시장 경제를 내세운다.

이들은 전쟁, 제국주의와 정복을 반대하며, 경제에 관한 정부의 통제 및 관리에 반대하며, 기업복지와 연고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이들은 자신을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렸으며, 오늘날에 와서 부르게 되었다.

 

2) 강성 자유주의자

강성 자유주의자는 20세기 중반에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 변형이 강성 자유주의로 사상이 급진적으로 버전 되었다.

이들은 재산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의 공공재, 복지 프로그램,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정부의 역할은 최소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정부는 법원제도, 군사 보호, 경찰만 제공해야 한다는 최소 또는 야경국가를 내세웠으며 일부는 무정부주의자이었다.

3) 신 고전적 자유주의자

신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새로운 사고 형태가 30년 동안에 등장했으며, 자신들은 피 흘리는 마음의 자유주의자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명시적,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위하여 사회제도가 충분히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며, 사유재산제도는 사람들이 잘못 없이 체제적으로 궁핍하게 하도록 하는 그 제도는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회정의라는 생각은 정의로운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혜택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으며, 개방되고도 자유로운 시장, 강력한 재산권, 경제적 자유와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3. 자유의 본질과 가치

 

1) 자유의 본질

자유에는 두 가지의 종류로서 소극적 자유는 흔히 개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중지시키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장애, 방해 또는 제약이 없는 것이며, 적극적 자유는 개인 자신이 결정한 대로 행하는 힘이나 능력이 있는 것으로서, 소극적 자유는 장애의 부재이며, 적극적 자유는 힘이나 능력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자유주의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자유는 소극적 자유라는 경향이 있어 자유의 의미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의미는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사회와 개인 자신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이 있는 사회를 원하며 적극적 자유를 수용한다.

적극적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정부가 법적 보장을 표명해주어야 하며, 적극적 자유를 증진하는 방법은 법의 지배, 재산권, 자유, 관용, 자유로운 시장을 지지하는 것을 허용하여야 한다.

자유의 중요성은 개인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넓은 범위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타인을 존중하며 모든 사람에게 넓은 범위의 자유를 인정하여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2) 자유의 가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많은 가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유가 더 커지면 일반적으로 건강, , 지식, 혁신, 행복 등이 더 커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 가치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있어 어떠한 비용이 들어도 자유이며, 자유로운 사회는 인도주의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고 있다.

자유주의자는 자유와 다른 가치 사이의 갈등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흔히 정부가 이러한 갈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권리에는 시민적, 경제적, 정치적 자유가 있으며, 시민적 자유에는 자유 언론의 권리, 집회의 권리, 결사의 권리, 양심이 자유, 신체적 무결성, 권리와 학대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 저항할 권리, 퇴거할 권리, 성에 관한 선택할 자유가 있다.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경제문제에서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편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유주의의 가치는 어떤 행동이 타인에게 강제를 가하거나 권리를 침해하거나 특정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한 독자적 정당화가 없는 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 자유는 투표하는 권리 및 공직에 출마할 권리이며, 개인에게는 타인들보다 우위에 서는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일반적인 권리는 절대적이 아니며, 잠정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4. 결론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시장을 옹호하며 상당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며, 신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정의로운 사회제도는 모든 사람과 특히,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함으로써, 불평등이 발생한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하다고 하지만, 모든 유형의 물질적 평등주의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는 모든 사람이 광범위한 경제 자유를 가지기를 바라지만, 반면 좌파는 경제 자유가 소득 불평등을 만든다고 믿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자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을 리버럴, 중도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라고 한다.

 

 

 

 

63. 자유주의의 확대에 관하여!

 

 

 

프랑스의 혁명은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사상적인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계몽사상시대의 가치관을 높이 평가하고 이 가치관이 궁극적으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신념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은 공화제 정부형태, 대의제 입법기관, 성문헌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 보통선거, 여성의 권리 등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대분할 수 있으며, 정치적 자유주의는 로크와 계몽 사상가들의 저술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고,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선봉하면서 자유야말로 인간사회가 진보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경제적 자유주의 핵심은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배제하고자 한 것이며, 국가는 생산과 교역을 통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자유와 평등은 계몽사상의 이념이었으나 그 적용범위와 대상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혁명은 정치적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사회계급의 타파와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실현된 프랑스의 정치제도와 사회구조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일부 시민에게만 한정되었으며, 여성은 보통선거에서 제외 되었으며 사회의 일부계층에게는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혁명 후 제정된 헌법에서 노예제도와 관계되어 대서양 노예무역이 절정기를 맞아 노예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부터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제 폐지운동이 일어났으며, 1833년 영국의회는 2천만 파운드를 노예 소유자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하기로 하고 영국제국 내에서 노예제 폐지를 가결하였다.

다른 나라들도 영국의 예를 따라 프랑스는 1848, 미국은 1865, 쿠바는 1886, 브라질은 1888년에 각각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는 법적 의미가 있을 뿐인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인 한계가 있는 것은, 흑인 노예는 법적 자유를 얻었을 뿐, 정치적 평등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성해방 운동에서도 흑인해방 운동이 여권신장에 영향이 미쳤으나 여성의 평등한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운동이 진행되고 부녀자들이 동참하면서 여성의 평등권 주장이나 지위 개선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성은 노예와 같이 법적인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으며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어 고등교육이 필요로 하는 전문직에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정부와 사회의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여권 옹호론자들은 영국, 프랑스, 북아메리카에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남성에게 허용되는 모든 권리를 여성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1793년 파리에서 급진적 여성들로 구성된 혁명공화 여성협회가 결성되어 투표권 행사에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활동을 하였다.

19세기에 여권 운동은 사회개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으며, 1833년 필라델피아 여성 반노예제 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여권주의자 회의에서 남성의 권리와 같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12개조를 결의를 하였다.

1860년대 이후 각국 여성은 자신들의 이익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조직적으로 여권운동을 전개하여 19세게 후반부터 여권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내용은 여권운동은 자선사업과 교육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여성의 극도의 빈곤, 가혹한 여권, 여성의 순결과 모성의 이상상 등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여권운동은 정치적으로 남녀의 평등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여성 노동자 조합운동을 중심으로 보수와 노동조건 등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전문직 취업의 어려움과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다가 본격적인 여성의 권리 보장은 20세기의 전환기부터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성취될 수 있었다.

 

 

 

 

64. 정치적 자유주의에 관하여!

 

 

 

1. 정치적 자유주의 개념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의 개념으로서는, 우선 시민들의 공정한 협조조건과 사회의 기본제도가 공정하며, 정의가 구현되는 질서정연한 민주사회로서 합당한 다원주의를 전제로 할 때, 화합과 안정성을 확립하고 보존할 수 있겠는가를 문제시 하게 된다.

그래서 질서정연한 사회가 어떻게 화합할 수 있고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정치적 자유주의와 또 다른 하나의 개념으로서 합당한 포괄적 교리들 간의 중첩적 합의라는 개념이다.

 

 

2. 정치적 자유주의 특징

 

 

정치적 자유주의 특징은, 사회의 기본구조 내에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로서, 기본제도의 구조는 출생과 사망을 통해서만 가입과 탈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일종의 강제력으로서 법률을 지탱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정부의 구속력에 의해 뒷받침이 된다는 것이다.

입헌 정체에서 관찰되는 정치적 관계의 특징은, 정치권력이 공적인 권력으로 집합체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공적 이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 권위의 일반적 구조의 정당성에 대한 것으로서, 시민들을 합당하고 합리적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존재하는 합당한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교리들의 다양성을 정치문화가 갖는 특성을 간주하고 있다.

 

 

3. 결 론-자유주의 원칙

 

 

정치적 자유주의에 있어서는, 정치권력의 행사는 헌법에 의거할 때에만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헌법의 본질적 요건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시민의 공통적인 인간 이성이 수용할 수 있는 원칙과 이상에 합당하게 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정치적 정당성에 관한 자유주의의 원칙인 것이다.

합당한 입헌정체의 존재로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헌법의 본질적 요건들과 기본적 정의는 정치적 가치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정치적 가치들과 갈등의 여지가 있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비중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특별한 영역의 가치들(모든 가치들의 영역의 하부 영역에 속하는 가치들)이 갈등적인 다른 가치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들의 특별한 영역, 정치적인 가치로서 자유로운 입장으로서 제시하자 하는 것은, 정치적 영역의 가치들이 자신의 포괄적 교리내의 다른 가치들과 어떻게 결부되고 있는지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인의 시민들은 양심의 자유부분으로서 맡겨지게 된다는 것으로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종교와 철학의 역사보다 광범위한 영역의 가치들이 정치적 정의관에 의하여 규정되나 정치적인 특별한 영역에 관계된 가치들은 일치하거나, 이를 지지하거나, 아니면 상충되지 않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65.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이란, 단적으로 정치가 실제로 어떤 것이며, 정치가 어떤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본질을 규명한 것이다.

여기서 정치란 것은, 쉼 없이 강물처럼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면서,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 속성이 있다.

정치의 지배자는 정치권력을 변하게 하거나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구조와 기구로 지배할 것인가를 골몰하게 된다.

, 현실을 중시할 것인가, 가치를 중시할 것인가, 더 나아가 국가를 어떻게 설계하여 건설하고, 유지하여 지탱함으로써, 더 좋은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정치는 갈등의 특성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는 언제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해석으로 정치권력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본질은, 정치학의 규범적 문제의 해결에 있으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 근원에 철학적, 이론적, 탐색을 경주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며, 실현할 수 있는 정치질서와 원리를 탐구하는 입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넓은 의미로 정치철학의 한 작업으로서, 정치사회의 운영원칙의 수립에 대한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이 아닌 정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정치적 구성주의라는 이론적 입장을 표현했다.(롤즈)

여기서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은, 탁월성에 있어서 정치적 문제를 종교나 도덕, 그리고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시켜 정치영역자체에서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철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각시켰다.

롤즈의 가장 적합한 정치관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전생에 걸쳐 사회의 완전한 협력적 구성원인 시민상호간의 세대에 걸친 공정한 사회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현대 자유민주사회의 특징으로서 규정하는 합당한 다원주위의 현실에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간의 다원성의 사회에서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66. 현대보수주의 사상에 관하여!

 

 

 

 

서언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이나 주장이 아니며, 특정 지역과 시대에서 활발히 제게 되는 질문, 의구심, 사랑 등에서 왔다.

보수주의자들이 법, 자유, 정의를 둘러싸고 벌였던 모든 분쟁은 역사적이고 실재로 공동체 안에서 벌어졌다.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의 뿌리가 정착 공동체에 있다고 믿으며, 그 정착 공동체가 특정 지역, 관습, 역사와 그 역사를 공유한 사람들을 한데 묶는 동기가 되었다.

보수주의자는 반동주의자가 아니며 자신을 보존하려면 개혁하여 적응해 가야 하며, 자신과 자신들에게 있는 그 무엇을 계속 지켜 내려고 한다.

 

 

2. 현대 보수주의의 시작과 탄생

 

 

현대 보수주의는 계몽시대의 산물이며, 역대 모든 문명에서 살아온 인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고전만큼이나 오랜 철학의 유산을 계승했다.

정치적 사고의 한계를 규정하는 인간 조건에서 보수주의자들의 철학적 특징은, 사회적 소속감으로서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부족사회에서 친족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거나, 종교적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속감은 제례와 신앙으로 규정했으며, 정치적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계는 법이 지배했다.

현대의 세속적인 국가에서는 그 법을 시민이 선출한 대의원들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이 법의 집행은 주권이라는 권위가 보장했으며, 부족사회, 종교사회, 정치사회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현대 보수주의가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정치질서의 부상으로서 시작되어 순수하게 정치와 법률로만 재편되어 가던 공동체들에서 종교와 친족사회의 가치들을 지키려는 시도로 등장했다.

보수주의는 그 자체만의 어떤 강령이나 철학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자유주의 안에서 생성되었다.

18세기 들어서며 국민주권의 요구는 처음 미국 혁명으로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에서 폭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보수주의 이론과 정책으로 명료해져 갔다.

예를 들면, 미국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맞섰던 보수세력의 분열이 확대되면서, 자유주의자의 후계자들은 시장경제, 제조업, 자유 교역의 방향으로 옮기면서, 도시는 정착지가 아니라 생산과 교환의 중심이 되면서 자유시자을 추구하던 미국 정치 흐름을 파괴 시켰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의 탄생은 대개 하는 님 아래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 정책 공동체를 구축하여 도시 문명의 중심으로 건설하겠다는 견해를 가졌다.

결국,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적대적이기보다는 공생적이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방어하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는 뚜렷이 구별되며, 자유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반역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복종했다.

 

 

3. 결론

 

 

현대보수주의는 국민주권을 요구하는 세력에 맞서 전통을 옹호하려고 시작되었다.

진보주의 물질주의적 강령에 맞서게 될 경우는 종교와 고급문화를 배양에 호소했으며, 사회주의와 투쟁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힘을 합하여 서구 문명이 맞닥뜨린 적들과 싸웠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보수주의는 지식인들 삶의 변방에서 존재했으며, 정치와의 연계나 지지받지를 못했다.

 

 

 

 

 

67. 민주주의 개념과 이념

 

 

1. 민주주의의 개념

 

 

국가의 지배 권력이 어떠한 특정계급이 아닌 사회전체의 구성원들에게 합법적으로 부여된 정치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개념적으로 여행용 가방이 있다면, 그 속에는 독재정치형태(히틀러의 파시즘, 스탈린의 공산소비에트체제 등)등 각종의 정치형태를 모두 가방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 칭해야 하는 것은, 헌법에서 명시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링컨은, 주권재민인 국민의(of the people), 민주주의 수단인 국민이 청치에 참여한다는 국민자치의 원리인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민주주의 목적인 국민의 복지증진을 천명한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정치라고 하였다.

 

 

2. 민주주의의 이념

 

 

1) 인간의 존엄사상

인간존엄사상으로서, 자유민주의 국가에서는 헌법과 법률에서 자유권을 엄격히 규정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도록 규정하여 보장하고 있으며, 인간생활에서, 모든 분야에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하도록 인간존엄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2) 자유

자유의 이념은, 민주주의 사상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모든 자유를 말하는 인간의 본성을 바탕을 두는 근본적인 추상적 이념이지만, 소극적인 상태는 국가로터의 자유를 말한다.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바에 따라 생동하고, 좋아하는 대로 생활하며 어떠한 법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서 방종적인 자유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용인된 자유는 평등의 원리에 의하여 제한을 받으며, 책임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고, 그 선택된 자유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의무가 있어, 무책임한 자유, 방종적인 자유를 제재하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유는 정치적 자유는 현실정치에 국민대중 각자가 참여할 수 있는 자유이며, 경제적 자유는 모든 국민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경제 분야에서 자유로운 활동의 기회를 갖는 것이며, 지적자유는 사상, 연구, 발표는 국가이익과 안전보장의 범위 내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3) 평등

인간의 평등사상은, 고대 로마시대의 종족의 혼합과 국가기반의 확대, 기독교 대두 등의 배경으로 하였으며, 근대의 평등의 의미는 18세기의 계몽주의 확립에서 나온 자연법의 이론으로서, 모든 인간의 자연적, 평등, 보편적 인간적 평등에서 출발하여 정치적 법률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

근대민주주의 평등이념은, 법률상의 평등으로서 법률 앞에서 기회의 균등을 말하며,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평등화의 추진은 보통선거제의 채택의 결실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의 근대화되면서, 오히려 불평등을 조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천적 불평등에 대한 소외감만이 생겨났다.

현대사회의 후천적 불평등은 고통이었으나, 모든 사람은 동일한 법적,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여야 하고, 지위 계급 등에 발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사회적 차별에 항거할 권리를 가지는 자유를 말한다.

 

4) 박애

박애정신은 자신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관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존엄한 존재로서, 개인의 권리는 신성한 것이며, 개인으로서의 인격은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욕구나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은 제각기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서로 대립과 동시에 감정을 가지고 상호간의 교감을 하며, 평화와 행복을 위해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공유하는 인간관계의 확립이 사회적 사명이며 도덕이며, 정의인 것이다.

 

 

 

 

 

68.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주의(nationalism)의 개념은, 하나의 민족에 귀속된다는 심리적 조건과 정치적 측면에서 한 민족이 국가를 형성하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또한, 역사적 공감성과 운명공동체적인 연대의식을 갖는 집단으로서, 민족을 바탕으로 민족구성원들이 자기의식을 정치적 표현하려는 애국심을 갖는다. 이러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는 민족적 전통과 민족의 이익, 민족적 사명의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민족주의의 연원은 17세기의 절대군주제도가 성왕한 시대로 올라가면서, 민족주의라는 표현은 프랑스혁명 이전인 중엽부터이며, 대표적인 것은 낭만주의 사조로 당시의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반대하며 감정, 느낌, 상상력을 강조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는 일치하지 경우가 많으며,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 3세계 근대화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민족주의 특징은, 종교는 종교가 국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것이며, 언어는 단일 공통언어로 존재하고, 동일 인종과 경제체제 및 문화에서 생활풍습과 가치관을 공동으로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이 종교, 언어, 인종, 경제체제는 민족형성의 촉진요소이었지만 필요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며, 민족이란 집단만 존재한다고 민족주의가 아니며, 민족이 민족의식을 갖고, 민족의 동질성을 위해 국가를 현신하려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역할은 민족은 어느 집단이나 가족, 부락, 이익단체, 정당, 국제기구는 어느 국가보다 민족을 위해 충성을 강요하는 최고의 연대집단이라는 것이다.

민족의 우월감을 가지고 자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타국의 문화보다 우수하다고 믿으며, 개인의 권력욕의 만족과 정당화시켜준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개인과 민족이라는 집단과의 동질성과 연대감을 유지함으로써, 개인의 심리적으로 만족에 대하여 보호된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어떤 국가라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여, 정부가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취해야할 때는 국민은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게 된다.

국민이 분열되어 정치가 불안해지면, 정부는 민족주의 이름으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면서, 국민들이 유대감, 안정감, 우월감을 주어 국민의 권력욕을 만족시켜 줌으로써, 국가정책의 지지를 얻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다.

국제적으로는 민족주의는 비 공산국가에서는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에 민족주의가 강화되었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소련의 지배에 반대하는 공산주의를 민족주의화 하는 현상이 일어났었다.

민족주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을 강하게 추구하고, 민족번영과 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민족성원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

 

 

 

 

 

69.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란 무엇인가?

 

 

 

사회주의 운동의 연원은 18세기 산업혁명의 산물로 산업과정의 기계화로 인하여, 자본의 집중과 막대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대신에 이에 대한 노동자 계층의 물질적 요인, 정신적 불안과 생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한 사회사상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의 목적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극대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저임금과 무제한의 노동력을 착취시키는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고자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나누어졌다.

공산주의는 폭력혁명이라는 급진적인 정치노선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조합운동과 의회라는 제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진적인 계획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었다.

국제사회주의 운동은 공산주의와 대립되면서, 점진적인 민주사회주의로서 페이비어니즘(Fabianism)으로부터 그 사상적 실천원천을 찾을 수 있지만, 정식적으로 일반화된 것은, 1951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t)선언과 오솔로선언으로 민주사회주의 생성과 발전의 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생성과 발전연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민주사회주의 의미는 매우 다의적이나, 민주주의는 민주사회주의를 통해서 이룩할 수 있으며, 가장 휴머니즘 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잘 조화시키는 이상적인 정치이념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를 그 정치적 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사회주의 사상은 반독재와 반 마르크스주의로서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과 안전장치이며, 공산주의 및 고전적 사회주의 폭력혁명론을 무산, 추방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민주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와 농어민이 이룩한 경제적부를 일부 독점집단과 결탁한 금력으로 의회를 독점하거나 권력세력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나 소수 계층들이 민족분단을 영원히 고착하려는 사고와 행동을 막고, 농어민과 근로대중 그리고 소외계층들의 올바른 권익을 대변하는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갖는다고 하였다.

민주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의 차이점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는 모든 것은 나에게라는 절대사유를 말하며, 공산주의는 모든 것은 전체라는 절대공유이나, 민주사회주의는 모든 것은 너와 나에게 즉 필요한 것은 각자라는 균형소유를 의미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모순을 배격하고 혼합경제로 합리적인 경제계획을 통해 부익부, 빈익빈의 불합리성을 타파하여, 경제발전에 혜택이 고루 돌아가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정치이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정당은 대체로 민주사회주의에 입각한 정당으로서 국가의 법적 제도 하에서 정강.정책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서구에서 이식된 정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사회주의 정당의 예로는, 영국의 노동당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며 철학적으로는 벤담(Bentham)의 공리주의와 그리인(Green)의 이상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민주사회주의로서 사회의 기초구조에 관한 분석방법은 케인즈의 신경제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 이념, 정의정신, 연대주의 등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에 표현된 민주사회주의를 최상위에 둔다고 한다.

민주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혁명도 피하고 민주적 수단을 이용하여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절차에 의한 정치사회를 유지할러는 사상으로서, 민주주의, 사회주의, 인간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 등의 내용으로 하는 철학적 사상으로서, 유물론과 구별되는 관념론적 철학에 속하는 사회민주주의와 구별된다.

결국, 넓은 개념의 사회민주주의는 좁은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와 영국의 노동당의 이데올로기인 민주사회주의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서구의 모든 사회주의 사상은 민주사회주의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민주사회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착취관계가 아니라 노동보호, 실업보호, 양로보호 등 많은 혜택을 주며, 부의 분배 방법에서도 세제개혁, 경제통제, 산업국유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지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