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왕자의 난
1. 조선 탄생의 배경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에 토지 계획을 하며 정권을 고려의 나라로 그대로 둔 채로 자신이 왕위를 계속할지 아니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지를 고심을 하였다.
고려를 유지한 채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정몽주 중심의 온건파와 고려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도전 중심의 급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성계는 1392년 사냥을 갔다가 낙마하여 생명까지 위독하여지자 정몽주의 온건파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서 급진파를 제거하여 고려 왕조를 보존할러는 생각에서 정도전을 감금하고 조준과 남은 등 급진파 핵심인물을 귀양을 보냈다.
이때에 이성계의 다섯째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의 실력과 성리학을 공부한 엘리트로서 신진사대부들이 정몽주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픈 이성계를 모시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 핑계로 집에 왔다가 돌아가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피를 흘려가면서 왕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반대를 하였다.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하여 술자리를 만들면서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설득을 하였지만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사람을 보내어 선죽교에서 죽이고 난 후에 이색, 이승인, 길재 등의 온건파 집단을 축출하고 새 왕조를 창건에 반대하는 이들을 제거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
이성계는 급진파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왕위에 오르면서, 개경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1년이 지나면서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새 왕조를 창건하였다.
2. 왕자난의 배경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지지 세력을 개국 공신으로 책봉하였으나, 이방원 자신은 권력에서 배제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개국공신의 선정과정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없어 실망을 했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개국 공신을 인정했지만, 왕의 아들이란 이유로 선정하지 않고 허울뿐인 왕자라는 신분 만주어 실질 작인 영광은 없으며 정계에서도 소외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정조전이 있어 사실상 정치의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동문수학한 동지들을 구합 하여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하였다.
더욱이 정도전은 이방원을 완전히 정계에서 차단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설득하여 왕의 계비인 이방원의 새어머니였던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세자를 제외한 모든 왕자들을 전국 각도에 보낼 것을 권유하였다.
이방원은 자기야말로 아버지를 이어 다음 왕의 자리에 맞아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아들의 세자 책봉에 분노를 하였다.
3. 왕자의 난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대부분 정도전의 합리적인 세자책봉이라 하더라도 왕위 계승 서열 안에 있던 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반면, 몇몇의 공신들은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고 군대를 키워 명나라를 자극하는 일과 과전법을 기획한 조준에게 크게 격론이 벌어지면서, 조선 건국 과정의 연대마저 깨어졌다.
이방원 중심으로 결합한 신의 왕후의 소생 왕자들과 조준 등의 일부 공신들은 반 정도전과 제대로 된 세자 책봉 문제로 일시적인 정치연합이 단행되었다.
연합한 이들은 이방원의 중심으로 정도전 일파를 한양에서 모조리 살해하고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을 폐위시켜 귀양을 보내던 중 살해하였으며, 이방석의 동복형인 이방번도 죽이면서 모든 변수가 제거되는 제1차 왕자 난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성계는 몸이 파 누워 있는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 대책을 강구할 수 없었다.
이성계는 인생무상을 느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둘째 아들 영안군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 땅 함흥으로 떠나고, 왕위를 물려받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이었다.
정종은 사실상 이방원에게 왕위를 선위하기 위하여 잠시 왕의 자리에 있는 아들이 없는 마음 착한 형이었으나, 이 자리를 노린 넷째 형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이방원은 이를 제압하고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으로 왕이 된 이방원은 가장 먼저 왕권을 위협하는 사병을 혁파하고, 심리적으로 거슬리었던 “국왕과 신권의 균형”이라는 시스템을 왕조국가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하여 자신이 국정을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태종은 끝까지 왕의 자리에 집착을 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세종은 아버지 만든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 때문에 민본을 바탕을 둔 훌륭한 유교 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