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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을사늑약에 관하여!

을사늑약에 관하여!

이완용

을사늑약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1905년 11월 17일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증명 전에 들이닥쳐서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강제로 위협하여 체결한 조약이었다.

우리나라가 35년간 일본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대한 제국의 외교권 박탈하는 을사늑약이었다.

 

이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차지한 조약으로서, 일본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과 친일 매국 행위를 한 민족반역자인 이완용의 친일파가 있었다.

이후, 이토는 일왕의 친서를 고종에게 전달하며, 동양의 평화와 조선 황실의 안녕을 위해 대한 제국의 외교를 일본이 맡겠다고 했다.

이는 조선의 외교권 문제로 전쟁이 자주 일어나니 일본이 관리하겠다는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 하는 논리였지만, 고종은 굴욕적인 친서를 거부하였다.

 

그 후, 이토는 고종에게 내밀은 문서는 대한제국에 일본 정부의 대표자인 통감을 두고, 통감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라는 을사늑약이었다.

을사늑약을 거부하면, 더욱 불리한 상활을 맞는다고 고종을 협박을 하였으나, 고종은 대신과 백성의 뜻을 고려한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루었다.

1905년 11월 17일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대신들과 이 사안을 논의하였으나 체결은 불가하다는 반대의 뜻을 모았다.

회의 결과는 반대로 결정이 나자 이토는 헌병사령관과 군사령부 부관을 대동하여 고종을 만나려 했으나, 고종은 아프다는 핑계로 만나주지를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을 미루는 의도로 대신들과 협상해서 조약 내용을 처리하라고 했지만, 이토는 고종의 속마음을 알고 대신들이 모여 있는 덕수궁 중명전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을 이끌고 가서 강제로 체결을 하였다.

이날 밤 회의장에 갇힌 참정대신 한규설, 외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 하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고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 모두 8명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을사늑약에 찬성하고 사인한 5명의 을사오적은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에 바친 사람들이었다.

 

끝까지 조약체결에 반대한 사람은 지금의 부총리 격인 참정대신 한규설뿐이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가 엄어서 이토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의 찬성했다는 빌미로 조약체결을 선포하였다.

을사늑약 체결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했으며, 고종은 몇 시간을 눈물을 흘리다가 피까지 토하였다.

민중들은 격분하여 조약파기를 외치면서 황궁에 몰려들어 목 놓아 울었으며, 을사오적을 향한 비난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를 파기하기 위하여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편화회의에 특사를 비밀리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을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본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여 을사늑약을 무효화하려던 고종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고 사망을 하였으며, 그 후,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