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新幹會)란 무엇인가?
1. 의미
신간회는 1927년 서울에서 조직된 국내의 민족유일당 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적인 모임으로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서,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 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하여 민족유일당 운동이 조직되었으며, 일제 강정기의 가장 대규모의 합법적인 결사로서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2. 성립요인
1924년 전후 만연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에 압도되어온 민족주의 진영에서 대표기관의 탄생을 열망함으로써, 국내 사회주의 진영의 활동이 6.10 만세를 고비로 점차적으로 퇴보하자 민족주의 진영과 손잡고 재기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을 제의하여 민족유일당 운동이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민족. 사회주의 진영의 동태파악과 계보활동을 추적하여 구금하기 위하여 허가를 하여주었으며, 발기인으로서는 신석우, 이상재, 안재홍 등 조선일보 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3. 활동 상황
활동 강령으로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면서 기회주의 일체를 부인하는 등이었으며, 규약은 25개 조로 되어 있고, 회의명칭과 사무실 설치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 후, 신간회와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의 명제세 등과 통합을 추진하여 이상재와 권동진이 정 ,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간사는 35명, 전형위원 11명을 선출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본부의 회장단은 거의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하여 사회공산주의 계를 기선제압을 함으로써, 불만이 누적되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이고 타협적으로 활동이 허용이 되어, 서울과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는 등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회원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27년 7월 1일 조선중앙 기독교청년회에서 열린 대회에서 기선을 제압당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영은 회칙을 개정하고 중앙의 권한을 증강시켜 집행 위원제로 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중앙 집행위원장이나 지회장 선출에 따른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의 목표는 뚜렷하였으며,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하여, 언론 집회 결사 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하고, 청소년과 부인 형평운동을 투쟁방향으로 삼았다.
또한, 파벌과 족보 주의 배격과 동양척식 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근검절약과 민족혼을 되찾는 우리 얼의 건재 성을 국내외로 널리 알려서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1929년 12월 13일 민중 선언서 발표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이 중지 요청을 해도 묵살하고 강행하려고 하자 조병옥 김무삼 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 간부 40명을 연행 구속하였다.
결국, 신간회는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계가 우익진영에 기선을 제압당하자 부산지회를 통하여 해소론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 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하여 창립 4년 만에 해산을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