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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술

시가의 형성과 변천

시가(詩歌)의 형성과 변천

1. 시가의 개념

시가란, 문학의 부류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서, 사람과 관점, 시대의 환경에 따라 정의가 다를 수 있으나, 원시 종합예술(ballade dance)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윤동주

2. 시가의 역사

시가는 옛날부터 독립된 양식이 아니라 음악, 무용과 함께 미분화 상태였으나, 시가, 음악, 무용의 삼위일체로서, 원시종합예술이 분화 발전하여, 몸짓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말은 시로 나타났으며, 시가는 처음에는 구비문학 단계에서 문자 발생 이후에 기록문학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원시종합예술로서 호남지방의 “강강술래”,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 나 네” 등이다.

3. 시가의 형성과 변천

1) 고시가

우리나라의 시가는 서기전 한역으로 전하는 노래로 시작되었으며, 고대의 부족 국가 시대로부터 삼국 초까지를 말한다.

한역으로 된 노래로 남아 있는 최초의 작품은 “구지가”, “황조가”, “공후인” 등이 있다.

여기서 “구지가”는 가락국 건국신화의 일부로 국가적인 행사에서 가락국 건국신화의 일부로 가창된 의식이라고 보인다.

“황조가”는 작자와 연대의 미상인 최초의 작품이며, “공후인”은 죽음과 고독을 노래한 서정시로서, “해동역사”에서 널리 알려졌다.

이외의 신라 유리왕대의 “도솔가”는 기악의 시초로서 제의적인 기능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향가

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며, 개인의 창작 시인 것으로서, 넓은 의미는 중국 시에 대한 한국의 독특한 시가라 할 수 있으며, 좁은 의미에서는 이두문자를 표현을 매개로 한 신라의 시가이다.

현존하는 향가는 신라가 독차지하고 있던 “삼국유사”에 있는 신라 향가는 향가로서 백미(白眉)이며, 주어진 생활 속에서 즉흥적으로 읊어진 “서동요” 등은 초기의 향가로 민요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향가는 민요와 다른 세련된 수사와 투절한 시 정신을 구비하였으며, 신라의 화랑 사회 이상이나 불교사상이 반영되었다.

3) 고려 속요와 경기체가

고려 중엽부터 향가의 노래가 자취를 감추면서, 민요적인 궁중의 노래로 등장하여, 속가, 별고, 장가 등의 고려속요가 생겨났다.

이러한 속요는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었으며, 동요 같은 형식의 노래인 ”청산 별고“, ”서경별곡“, ”가시리“ 등의 민요의 형식도 수록되어 있었다.

경기체가로서 전해지는 것은, 고려 고종 때에 안축의 ‘관동별곡“, ’죽계별곡”과 권근의 “상대 별곡”으로서, 무신정권 이후의 사대부 출신의 문인들의 작품이었다.

경기체가의 성격은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나 심미안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은 경기체가와 함께 시조를 창조하였다.

결국, 경기체가는 사대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사대부에 의하여 발전된 일종의 구족시가로서 고려가요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4) 조선왕조의 시가

조선왕조의 시가는 왕조창업의 송축가로 시작되었으며, 조선왕조의 건국의 찬양하고, 정치적 이념을 포상한 노래로서 궁중의례 악인 악장이었다.

조선왕조 초기의 대표적인 악장은 정도전의 “문덕곡”, “정동방곡“ 등이 있다.

특히,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 건국의 송가로서, 건국의 위업을 노래한 총 125장으로서, 한글로 된 최초의 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악장은 고려 속요나 경기체가의 공통적인 형식을 청산하였으나, 문학적인 형식은 정비되지 않아서 가사문학과 대조를 이룬다.

5) 조선 후기의 가사와 시조

조선 후기에 시작한 평민가사와 사설시조는 유가적 청교도주의의 반발로 나타났으며, 이는 선행하는 양반 가사나 유학자 시조의 변형이 아니라 이들과 대립되는 현실주의적 사고의 지속이며 그 변용이었다.

평민 가사는 일반적으로 길었으며,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농가월령가”로서, 농촌 사대부 부녀들의 규방가사와 평민들의 해학적 가사 등으로 성행하였다.

시조로서는 평민가객의 참여가 일반화되었으며, 대표적인 예로서는 김천택의 “청구영언” 등이었다.

특히, 평민가객들에 의하여 시조집에 사설시조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사설시조는 평민들의 생활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윤리적 규범을 회화하는 방향이면서도 자유로운 율격을 지녔다.

6) 개화기 시가

19세기말에 개항으로 서구 문화의 이입으로 인한 영향으로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개화 의식 고양으로 인한 시대정신을 작품으로 독립신문, 경향신문 등에 실린 애국 독립가, 개화 가사, 창가, 시조, 한시, 신체시 등 개화 시가는 주류를 이루었다.

개화시기의 시대적 요청에 충실한 형태는 공적인 경험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애국독립가 등은 의식적인 문학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신체시는 근대정신의 소산으로 전통과 인습을 타파하고 서구문화를 수용하려는 시대적 요청에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해에게서 소년에게”, “구작 삼 편” 등이 있다.

7) 근대시

1920년대의 근대시는 개화기의 시가보다 방법과 인식의 관점에서 상당히 전환되었으며, 그 이전의 계몽적 교훈주의와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근대시의 특징은 낭만적인 형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최남선, 이광수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근대시는 서구화의 물결에서 전통적 경험을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구화와 동일시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 사설시조와 같은 자유시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는 감상 시로서 감정의 용솟음과 산문하의 극복이 한국 근대화 시의 흐름이 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시조와 민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위의 “현실 시”로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한국 현대시의 본격적인 변화의 시기로서, 한국시 사회의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였으며, 시의 순수성을 강조한 “시문학파”의 심미적 탐구적인 활동이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3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적 경향이 나타나면서, 서구 시에서 보여주는 체험을 수용하면서, 한국시의 주지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한국시의 방향으로 심화, 확대에 열의를 보여준 생명 파인들이 나타나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고 형상화하는데 열정을 두었다.

 

“생명파“의 시는 ”시인부락“ 동인으로서 서정주, 함형수, 유치환 등이었으며, 이들은 도시 문명보다 생명의 깊은 충동과 삶의 의미, 고독, 고뇌 등의 주제로 하였다.

그러나 자연파(청록파)는 삶의 고뇌 자체를 노래하기보다는 고뇌에 찬 세계를 벗어나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표현하였으며, 청록 집의 시집에서 푸른 사슴이 표현은 상상적인 동물이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서는 향토적인 박목월, 자연세계는 조지훈, 불교적인 것은 박두진이 표현을 하면서 모든 갈등을 해소된 자연의 세계를 희구하였다.

 

그 후, 한국 시가는 일제의 탄압으로 완전히 중단되어버렸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이육사, 윤동주 시인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시를 발표함으로써, 암흑기의 민족문학을 지킬 수 있었던 최후의 등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