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성애(性愛)
쥐꼬리보다 짧은 초겨울의 낮은 청량리에서 출발한 특급열차는 안동역에 도착할 때는 역 광장은 서서히 어둠으로 채워졌다.
기차역 홈으로 들어서는 열차의 경적소리에 혜린은 지난날을 거꾸로 생각하고 있던 환상 속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딸을 업고 사람들 틈에 끼여 치약 짜듯이 밀려서 역 광장으로 나왔다.
역 광장에서 이리저리 살피던 혜린은 시계탑에서 하잘 것 없는 잠바 차림으로 고개를 숙기고 기다리는 남편을 발견했다.
기다리는 태평의 모습을 보고 속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등에 업혀 곱게 잠들은 딸을 생각해 반기는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가슴이 뎅그렁하게 느끼면서 남편이 살고 있는 월세 방에 도착하니 부엌은 밥해먹은 흔적 없고 기름 탱크에는 석유 한 방울 없다.
냉기뿐인 방에 잠시라도 있기 싫은 혜린은 서둘러 태화동 뒷골목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여관을 찾기 위해 골목길을 나왔다.
가로등 없는 담장 벽에 술 취한 남자가 대물을 끄집어내어 다리와 엉덩이를 흔들며 오줌을 갈기면서 지도를 거리고 있다.
겨우 허름한 여관을 잡아 딸아이를 사이에 두고 누웠으나 혜린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 늘어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늦게 옆방에는 술 취한 잡놈이 술집 아가씨와 왔는지 실랑이를 벌이자 괜히 이상한 생각에 가슴이 뛰면서 흥분이 됐다.
여자는 시간 없으니 빨리 대충 끝내라하고, 남자는 술 취해 일이 잘 대지 않는지 버둥거리자 여자는 멍석을 펴도 못한다고 신경질 부렸다.
남자가 C팔년이라고 욕을 해되자 여자는 급하게 방문을 닫고 나가고 남자의 맥 빠진 소리가 강물 속으로 돌멩이 가라앉듯 들렸다.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죽이고 잔뜩 기대 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혜린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흘러가버린 추억들을 실오리를 한 올씩 한 올씩 뽑아내듯이 생각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여고 1학년, 마지막 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의 오후.
하교 길에 매일 넘어 다니던 바위에 앉아 고등학생인 진구 오빠를 기다리며 발밑 산 아래 저 멀리 흐르는 왕피천을 내려다보았다.
물 언덕 위에 조개껍질 같은 초가집을 병풍 같은 산줄기가 멀리 둘러있고, 옆엔 아름드리 소나무 솔밭과 오미산 대밭이 쌓여있다.
바람 불어 푸른 물결이 파도처럼 춤을 추는 강물과 대나무 숲 속이 조그맣게 보이는 초가집이 진구 오빠의 집이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살고 있는 돌담으로 쌓은 초가집에 포도나무 덩굴과 뽕나무 잎으로 지붕과 마당을 덮은 사이로 방문이 보였다.
솔바람 결에 진한 솔잎 향기 맡으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진구 오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책가방은 옆구리에 끼고 서 있는 진구의 모습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솔잎 향기에 알짝지근하게 취한 듯 두 사연인은 서로 먼저 오면 기다리다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다녔다.
백 명이 넘게 발리재를 넘으며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행곡 마을은 너무나 행복한 동네라는 누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녁엔 언제나 진구는 혜린의 부모님 몰래 혜린의 방에서 놀기도 하고 혜린이가 없는 날에는 손가락으로 방 문풍지를 뚫어놓았다.
다음날에는 부모님한테 꾸중을 들었다고 혜린이가 종알거리는 투정에 진구는 언제나 그러한 모습에 귀엽다고 좋아했다.
무더운 여름날, 발리재 계곡 소 풀 먹이로 가서 혜린 소를 잃어버려 소낙비에 옷을 함빡 적시고 어두운 계곡을 함께 찾아다녔다.
건들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혜린이와 계곡을 헤매면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려 두려움에 떨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소를 찾았다.
산 계곡 가득히 새까만 물감이 가득 채워지고 애절한 목소리가 꼬리도 없이 묻혀버리면 두 연인은 한 가닥 희망을 함께 생각했다.
휴일 날 하늘 높이 찌른 적송 우거진 불영사 계곡의 바위 사이 흐르는 강물 속 돌 밑에 숨은 모래무지를 돌 벼락치기를 하여 잡는다.
물고기 매운탕으로 배를 채우고 나서 물장구치며 함께 노래를 부르다가 중천에 뜬 해가 노송 가지 끝에 매달리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름 밤하늘은 마치 숯 불제를 흩어 놓은 듯 온통 잔별 물결들로 출렁거리며 빤짝거렸다.
주천대 강둑에서 함께 모래무지 낚는 날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모래무지 습성은 낚시 미늘에 걸려 몸부림치어 살아나도 눈앞에 먹이가 있으면 금방 혼이 나고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덥석 삼킨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 나쁜 인간들에게 알고 속기도 하고 모르고 속는 순진한 인간과 같은 민물고기였다.
추운 겨울 방학이 오면 푸른 주천대 강물이 하얀 얼음 들판이 되면, 흰 눈 쌓인 오미산에 올라 속이 후련하도록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겨울 참새 한 쌍이 솔가지 앉았다가 후드득후드득 강 건너 마을로 황급히 날아갔다.
소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흰 눈 꽃가루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이슬 같이 내려앉았다.
낡고 침침한 여관방에서 혜린은 혼자만이 지난날의 아름다운 본능적인 사랑에만 쫒아가는 물구나무 선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