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추억
가을에 딸을 출산하자 동거생활만 할 수 없어 가까운 친지들만 초대하여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너무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서글펐다.
더욱이 아버지마저 생존하지 않는 결혼식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잔존했었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아버지는 너무나 좋아해서 집 앞마당 귀퉁이에는 이른 봄에 꽃을 볼 수 있는 자목련과 백목련을 심었다.
늦은 봄엔 담자색, 청색, 백색으로 다양한 포도송이 같은 꽃이 펴 진한 향기를 품어낸 라일락꽃나무를 울타리에 심어 꽃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특히, 아버지는 이른 봄에 노란색 작은 종이처럼 피는 개나리와 연분홍 꽃잎이 피는 철쭉을 좋아했으며, 집 울타리에서 골목길까지 꽃길을 만들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걸음마를 배우는 나에게는 강변모래사장 길을 손목을 잡고 같이 걸으면서 재미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모내기가 한창인 늦은 봄날, 아버지가 품앗이 일하는 논뙈기로 가면, 정심 때 먹는 감나무 잎사귀에 담아 준 공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학교 등교 길이 멀다고 싫다는 나를 자전거 뒤에 억지로 태우고 갈 때는 아버지가 신은 검정 고무신이 너무 싫었다.
아이들이 볼까봐 중간에 내려달라고 졸라서 걸어가면, 한 발을 자전거에 걸치고 서서 무심히 바라보던 쓸쓸한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언제나 줄달음치는 봄날을 아쉬워하던 아버지는 여고 2학년이던 어느 늦은 봄날, 뚫린 방문에 창호지를 바르다가 갑자기 혈압으로 쓸어졌다.
집에 아무도 없고 철부지인 언니와 같이 쓸어진 아버지를 부추기며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우리들에게 방구석에 먹다 남은 소주병을 돌라고 했다.
무슨 영문도 모르게 준 소수 병을 단숨에 마시고 아무른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불구가 되어 자식들에게 고생시킨다는 생각에 조용히 죽음을 선택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어른이 되고 나서 알고 나니 철없던 어린 시절이 안타까웠다.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지나간 시간은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도 추억으로 간직되었다.
어린 딸이 놀이방으로 가고 없는 혼자 방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던 혜린에게 갑자기 남소장이 단둘이서 만자는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혜린은 마음속으로 반가웠으나 남편과 딸아이에게 죄짓는 느낌이 들어 나갈 수 없다고 말하니 남소장의 달콤한 음성이 귓속에 들렸다.
두 사람이 몸은 떨어져 있어도 기분과 감정을 나누자는 숨넘어가는 음성이 들이자 혜린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스릴과 흥분이 자신도 모르게 고조됐다.
애절한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어간 혜린은 해오라기 난초의 꽃말처럼 아련한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총알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워도 이번 딱! 한번만 만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남소장이 말한 중앙동의 커피전문점인 “칼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에는 손님이 없는 관계로 이층나무계단을 통해 올라와서 구석자리를 골라 앉아 오매불망 남소장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소장이 바람난 수캐 모양 헐떡거리며 와서 혜린의 곁에 바짝 다가와서 앉았다.
시간은 총알보다 더 빨리 흘려간다는 생각을 한 혜린은 얼바람둥이 행동을 하는 남소장의 욕정을 불평 없이 깔끔하게 처리한 후, 황급히 일어났다.
집에 돌아온 혜린은 밤늦게까지 남편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불안한 생각에 몇 번이고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자 봉급날 술이나 도박판에 간 것 같았다.
여름 가뭄에 한 차례 소나기 지나가길 기다리듯, 남편 오기를 학수고대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와서 불길한 예감이 무척 들었으나 황급히 받았다.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가 경찰서라고 해서 남편이 도박으로 잡혀갔거나 아니면 교통사고 났던지, 아무튼 큰 사고가 아니기를 바라며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안에 한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 마태 평은 들어서는 혜린을 보고 어떻게 할 줄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서에 남편이 왜 잡혀왔는지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다는 생각에 혜린이가 담당직원에게 묻자 회사 여직원과 간통하여 여자 남편이 고발했다고 한다.
태평은 한사코 여직원과 술 한 잔밖에 마신 것 밖에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자 혜린은 곧이곧대로 남편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 남편이 돈 뜯으려는 수작이라고 취부 하고 싶었다.
경찰서는 확실한 물정이 없었던지 일단 집으로 태평을 돌려보내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가 잔뜩 난 혜린은 남편에게 여자와 10했느냐고 닦아세웠다.
가 부득 감 부득 할 수 없는 분명한 간통사실과 상관없이 그냥 아니라는 말을 남편에게 듣고 싶었던 혜린의 속마음은 자신과 같이 죄책감을 시달렸던 사랑 없는 육체적 욕정뿐이라고 단정했다.
모든 껍데기뿐인 남녀의 불륜관계는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솔바람 같고,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잊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