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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밀(Mill)의 정치철학

밀(Mill)의 정치철학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06년 5월 20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유년시절부터 천재교육을 받으면서, 엄격한 부친의 지도하에서 3세 때에 그리스어, 8세 때에 라틴어, 12세 때에 논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정당인 휘그당에 가입하여 하원의원으로서 사형제와 노예제 폐지 및 여성 참정권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이전의 인식은 불가능하며, 오직 경험적인 인식만 존재한다고 했으며, 수학과 논리학도 경험과 경험의 귀납적 일반화에 의지한다고 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갖는다고 했으며, 공리주의를 도덕의 토대는 최대 행복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러한 행복은 쾌락 내지 기쁨의 개념으로 불쾌감 내지 고통이 없는 것이며, 일종의 쾌락주의라고 했다.

 

그의 공리주의란, 질적 쾌락주의를 전제하면서, 오직 향락주의 자를 위한 윤리학이며, 벤담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응하려는 목적에 전개되었다.

그의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을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의 기준으로 간주하고, 지적이고 창조적인 혹은 사회적 활동에서 오는 쾌락주의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다면, 공리주의는 향락주의 자를 위한 윤리학일 뿐이며 비난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향유하는 기쁨의 순위는 학문적, 예술적 그리고 인간적 활동에 우선권을 주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종류의 기쁨에 우선권을 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공리주의는 설득력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의도는 훌륭한 평가를 충분히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경제이론은 분배법칙과 생산 법칙을 근원적으로 분리하면서, 부의 생산 법칙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의 결과로 인간의 처분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부의 분배는 인간의 책임에 속하며, 분배는 생산에, 생산은 다시 분배에 영향을 주는 상호관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론”에서 정치적 자유로서 개인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사회적 자유로서, 사회가 정당하게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개인의 사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로 확장했다.

밀의 정치적 사유로서 개인의 자기 권리와 자기 책임의 사상은 세계에서 폭넓게수용되어 높게 평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