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예술
1. 생애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에서 태어나서, 카프레세의 산조 반니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미카엘이라는 대천사와 안젤로라는 천사라는 뜻이 합쳐진 이름이었다.
1482년에 라틴어 학교와 1489년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그는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느꼈다.
1497년 쿠피드, 바쿠스 대리석을 제작, 1499년 “피에타”, 1504년 “다비드”완성, 1508년 유리우스 2세 청동 상제작 완성, 1511년부터 1512년 아다면서 창조 제작, 1512년 시스티나 성당의 궁중 천장에 “천지창조” 완성, 1531년 “줄리아노”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뒤에 완성을 하였다.
1535년 9월 바티칸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1541년 12월 “최후의 심판” 제작, 1550년 “피에타” 제작, 1553년 7월 미켈란젤로의 생애 출간, 1563년 피렌체 아카데미 예술원 명예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564년 2월 18일 오후 5시 병환으로 사망을 하였다.
2. 미켈란젤로의 예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도시의 평온한 언덕과 떡갈나무가 물결치고 보랏빛 하늘로 아름다운 이곳을 죽어서라도 살고 싶다며 태어난 고향을 사랑하였다.
그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자신을 키운 고향의 맑은 공기와 암석 그리고 떡갈나무 우거진 숲의 뒤로 아펜니노 산맥이 굽이치며 솟은 모습을 좋아했었다.
그는 학교 다니면서, 부친과 숙부들이 예술가란 직업을 싫어하는 완고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13세에 도메니코 기를란디오의 유명화가의 제자로 들어가서 스승보다 실력이 뛰어나 질투를 받았다.
그는 회화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웅대한 예술가의 꿈을 갖고 조각학교에 들어가서 공관에서 숙식하며, 훌륭한 플라톤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면서, 박학다식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 후, 그는 해부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수도원의 시체실에서 시체를 해부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으며, 이 분야에서 가장 풍부한 지식을 갖춘 미술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495년 봄, 사육제의 제전과 여러 당파들이 열광적으로 싸우는 마당에서도 피렌체로 돌아와서 “잠자는 큐피드”를 조각하였다.
그 후에도 “취한 바쿠스”, “죽어가는 아도니스”와 “대형의 큐피드”를 제작하였다.
그는 돌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 대리석을 좋아했으며, 정의 다룰 때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하나의 작품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항상 긴장의 연속에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1504년 “다비드상”이 완성되었을 때, 당시 시장이 작품 실에 찾아와 안목이 있는 것처럼 한 마디 비평을 하자, 그는 즉석에서 작품에 손을 대지 않고 가볍게 손을 놀려 돌가루만 조금씩 떨어뜨리면서, 비위에 맞추어 주었으나 그는 속으로 몹시 비웃었으며, 작품 속에는 그를 경멸하는 것이 배어있는 같았다.
1517년 그는 성로렌초 성당의 그리스도 상을 제작할 당시에 추석 장에서 과로와 절망으로 쓰러져 가면서도 제작을 완성하는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국립 미술관에 있는 그의 대리석상인 “승리자”는 훌륭한 체구와 곱슬머리가 이마에 나지막하게 덮인 젊은이의 나체상이었다.
여기서 “승리자“는 포로를 내려다보지 않으며, 내리치려던 손을 멈추고, 눈마저 돌리며 입가에 쓰디쓴 표정만이 짓고 있다.
이 모습은 승자로서의 승리를 원치 않는 표현으로서, 싸움에서 이겼으나 또한 진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든 고뇌를 절실하게 담아내면서,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워 이겨도 그는 승리를 원치 않아 바라는 것이 없다는 표현을 한 것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말년에는 “나는 나무껍질에 싸인 속대처럼 거쳐서 홀로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하였으며, 그는 자신에게 영광을 허락해 놓고 예술은 나의 험난한 인생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