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의 생애와 음악
1. 유년시절
김광석은 1964년 1월 22일 대구 대봉동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김수영과 어머니 이달자 사이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창신동 단칸방에서 살면서,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다시 대구 범어동으로 이사를 가서 다시 동덕초등학교 4학년에 다녔다.
그는 키가 작고 체구가 조그마해도 동료아이들에게는 목소리가 크고 맑았기 때문에 음악시간에는 인기가 좋았다.
아버지는 사재를 털어서라도 동네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나, 자식이 노래를 하겠다고 하자 사촌이 노래를 실패하여 도미를 하자 아들을 이런 연유를 반대를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창신동 초동학교를 졸업을 하고, 중학교는 현악 반에 들어갔으며, 고등학교는 1979년에 대광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교내 합창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교회의 성가대에 다니면서, 임지훈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교회에 다니면서 모범학생으로 키타를 익히며 청년부원들과 사귀며, 모교의 행사에도 공연을 해주었다.
2. 청년시절
김광석은 대학교를 음대를 지원하고자 하였으나 가정의 경제적 형편으로 포기를 하고 공무원이 되었으나 자신의 꿈을 결코 포기를 하지 않았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하고,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실현 가능성 갖고 꿈꾸며 살아간다는 것을 품고 살았다.
1982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 항쟁”의 영향으로 학생운동조직이 비약적으로 발전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는데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제약으로 다가와 자괴감에 빠져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을 찾기 위하여 방황을 하였다.
이러한 고뇌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그는 교회의 성가대 활동과 임지훈과 어울려 무교동과 신촌 일대의 라이브 카페를 찾아다니며 1970년대의 김민기 등의 포크음악을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메아리와 기독교회 청년회에서 나온 “젊은 예수‘라는 악보가 실린 책에서 ”못생긴 얼굴“이라는 노랫말에서, 그는 ”못생긴 얼굴“의 노래 가사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얼굴을 보면서, 현시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투신 못하고 외면하는 나약한 자신의 얼굴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자아의식과의 충돌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울기도 하였다.
이 노래의 계기는 대학연합노래 그룹인 “메아리”에 가입하여,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며,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켜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였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활동 중이던 라이브 카페에서 알려진 임지훈을 볼 때마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욕구가 발동하여 무교동 일대의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있는 업소는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그는 업소의 수없이 거절당하여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실망하여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오디션을 받았지만 연락이 오지를 않았다.
행운은 어느 날 기적 같이 온다는 듯이, 임지훈이 일하는 “코스모스 코러스”에서 첫 무대에 나갈 기회가 왔으나, 너무 긴장한 탓에 자신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음날 레스토랑에 찾아가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한번 노래할 기회를 달라고 하자, 사장은 정식으로 일해보라고 제안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 부족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장의 생각은 젊은 나이에 미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정식으로 일하라고 제안을 하였다.
그는 월급이라고는 차비를 제하고 나면 적은 액수였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만족감에 너무나 기뻤으며, 친구 상점에서 언제나 외상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밤마다 무교동과 신촌 일대와 이대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외모보다 거칠고 다듬지 않은 유난히 힘이 들어 있는 목소리를 좋아하였다.
그는 늘 기분이 좋은 마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1970년대의 다양한 곡목에 포크송부터 민중가요까지 못 부르는 노래가 없었다.
1980년대의 격변기 시대에 김민기의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 제작에 참여하였으나, 김민기 작품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자 선후배들과 같이 “새벽‘을 결성을 하였다.
그는 민중가요가 아닌 대중가요로서, 일체의 관념성을 배제한 사실성을 근거로 하여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과장 없이 풀어냈으며 그에게는 김민기는 스승이며, 나침 반가 같은 존재이었다.
1985년 1월 그는 군대 입대를 하여 6개월간의 단기 사병인 동사무소 방위병으로 근무를 하였다.
1986녀 그는 복학을 하여 전문 노래 그룹인 "새벽“에서 활동을 하였으나,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이 이루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을 하였다.
1988년 1월 11일 한 장의 음반의 방송매체에서 이름 없는 생소한 얼굴로 7명의 음반이 소문도 없이 세상에 나오면서, 대중음악의 주류 시대의 사업주의 사랑타령이 아닌 기교 없이 순수하고 순박한 이들의 노래가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동물원”에서 널리 알려진 곡은 “거리에서”였으며, 그의 슬픔과 잘 어울려, 다른 가수들은 김광석만을 위한 노래라고 할 만큼 그의 감성을 표현하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3. 가수로 홀로 서기
1989년 5월 동숭아트센트에서 “동물원” 공연 끝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시기에 “동물원”과 결별은 하고, 홀로 가수로 서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의 1집 음반에 자신의 자작곡 6곡을 포함한 10곡을 수록하였으나 대중과 비평가에 외면을 당하자, 그는 늘 불안정 속에서 안정된 화목한 가정을 가지면 미래를 위해서는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하였다.
1990년 6월 30일 그는 서해순과 결혼을 하였으나, 고정된 수입이 없어 정신적, 경제적인 고통스러웠으나,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버팀목이 되어서 음악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91년 늦가을 라디오 불교방송 전파를 타고 “밤의 창가”프로그램의 DJ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밤의 창가에서”를 진행함으로써, 폭넓은 기회를 가지었으며, 유명세를 치르면서, 원치 않은 이해관계로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방송 출연정지까지 당하였다.
그는 5년간 “밤의 창가에서”라는 종교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공중파 방송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음악을 제공하였으며,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무대가 되어 청취자들에게 이야기로 위로를 하여 주었다.
그의 방송 사연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남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1992년 3월 3일 그는 3집을 내면서, “나는 음악을 축으로 도는 팽이”라는 글귀를 적었다.
그의 노래에서 느끼는 감동의 한 축인 노랫말은 문학성이 있었으며, 삶과 연관된 진정성을 느끼게 하였다.
1994년 6월 그는 4집을 팔 표 하였으나, 이 음반이 정규 음반으로 마지막이었으며, 그이 마지막 힘들었던 여정의 글이 LP음반의 해설지에 담겨 있었다.
“날 지탱해 주던 것이 무너지던 날, 내 나이 서른둘 스펀지처럼 푸석푸석해진 나의 세상 마지하고, 날 인정하므로 또 한 번 내디뎌 본다.” 이는 4집은 체념과 희망이 공존하는 음반이었다.
1995년 6월 1일 그의 소극장 공연의 관객 중심으로 팬클럽인 ‘나우누리“가 만들어지고, 지금은 주인을 잃고 ”둥근 소리“라는 사이트로 운영되고 있다.
김광석은 ‘나의 노래“ ”거리에서 “란 노래를 유행시킨 인기가수로서, 1996년 1월 6일 새벽 4시경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무엇을 꿈꾸었는지, 어느 하늘이 그리웠는지,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 남겨두고 홀로 먼 길을 떠나는가,
그대가 비워 놓은 자리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가수로서, 아름다웠던 그가 그리워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