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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상

도산 안창호의 사상

안창호

도산 안창호의 사상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양성 밖 대동강변의 봉상도(도롱 섬) 조그만 섬마을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몽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비집안이었으나 농토가 없어 경제적으로 곤란했으며, 일가친척 가운데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 전형적인 잔반(殘班)이었다.

 

그는 7살 때에 부친이 돌아가자 할아버지 밑에서 국수당에 천자문을 배우다가 9살에서 13살까지 십정 거리의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으며, 14살에서 15살까지 한문, 동몽선 술, 소학 등 기초적인 지식을 배웠다.

그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난 1894년 16살 소년이었으나, 갑오개혁으로 마지막 과거시험이 있었으나 가난하여 시골서당에서 공부한 실력으로 어림없다는 생각에서 시험에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15살 때에 한양과 평양을 다니던 자주독립, 개화자강의 사상을 갖고 있는 우국 청년 필대은을 만나 친형제처럼 지내면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였다.

안창호 가족

그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봉기 와중에 한양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막노동하면서, 먹고, 잠재워주고 공부를 시켜주는 구세학당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구세학당에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우면서 성경과 교리문답, 기도하는 법도를 배웠으나, 18세 때에 할아버지가 이석관의 큰 딸인 13세의 시골소녀 혜린과 약혼을 정해하자, 종교와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혼인을 거절하였다.

이석관 가족은 약혼녀를 한양으로 데리고 가서 기독교와 학교를 시키라고 하자, 그는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약혼녀를 서울로 데리고 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시키는 배려하는 인간미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서재필의 연설에 감동을 받아 배재학당에 토론서클에 가입하여 서재필과 윤치오 등과 정기적인 토론에 참여를 하게 되었으며, 서재필의 논리 정연한 연설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로 하여금 일생을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고 충격을 받은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던 문명개화의 길에서 현실적인 구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필대은과 같이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평양과 한양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석상에서 유명한 웅변을 함으로써, 지명도를 가졌을 때는 이미 서재필은 압박을 피해, 1898년 6월에 도미를 했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인 독립자주와 민권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웅변실력으로 1만여 명이 운집한 만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독립자주와 입헌의회설립, 문명개화의 목표였으나, 정치단체로 전환되면서, 정치의 공감대 부족과 대안 및 리더십 부재로 수구파의 탄압에 실패를 하였다.

그는 외세에 의존적인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개혁을 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검거할러고 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필대은과 같이 도피를 하였다.

어린시절 안창호

그는 필대은이 병으로 죽자, 큰형인 안치호가 이사를 간 강서군 동진면 바위고개에서 계몽학교라는 남녀공학인 사립학교인 초등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계몽학교라고 했다가, 불타서 신축했을 때는 점진학교로 바꾸었으며, 교육과 개간사업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봉건적 사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했었다.

그는 수구파의 감시와 탄압이 강화된 정세에서 운영난으로 곤란을 겪자 점진학교를 문을 닫고, 부강한 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직접보고 배워 돌아와서 구국운동에 나서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24살 때에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양역 앞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김윤오 주선으로 밀러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인 그는 아내와 같이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에서 부부가 드류 의사 집에서 기거하면서, 하우스 보이로 일을 하다가 몇 개월 후에 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 영어를 익히기 위해 그래머 스쿨 과정에 나이 관계로 겨우 입학을 하였다.

그는 낮에는 노동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동포들 집을 방문하여, 이들을 설득하여 5~6명의 인삼장수들을 모아 중국인 교회를 빌려 주일마다 설교를 하면서 동포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자, 1년 후에 동포들과 상황 친목회를 발족하였다.

그는 친목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후에 거주지를 LA로 옮겨가서 리버사이드에서 18명의 한인 이민 노동자들과 공립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귀국하기 전에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는 입헌군주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조직의 보안과 지속성을 위해 일회(一會)를 미국 가주 하변성에서 대한 신민회라는 발기를 하였다.

그는 30살 때에 1908년 1월 초순에 신민회 취지에 동의한 동지들이 모여 정식 창립대회를 발기인 5명이 개최하였으나 나중에 몇 명이 추가되었다.

흥사단

그는 1909년 31살 때에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인재 발굴과 훈련을 시작하였으며, 10월 31일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용산 헌병대에 구금된 후, 영등포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2월 21일 석방되었다.

1910년 1월 9일 그는 다시 구금되어 40 여 일만에 석방되었으나, 그가 활동하는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전쟁 준비 등의 구국운동이 주축이었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샌프란시스코 친목회, 공립협회 등의 조직경험을 활용하였다.

일본 경찰이 신민회 105인 기소사건은 600여 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하였지만 조직의 전모가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1910년에 망명을 결정하여 북경을 거쳐 블리디 보스토크로 도착하였으나 망국의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였으며, 1911년 33살 때에 재러 한인 학교를 설립하고, 다음 해에 북미 실업 주식회사 설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35살 때에 발기인 20명으로 흥사단 창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사무장으로 조직 전반을 총괄하면서, 흥사단을 상징하는 기러기 깃발, 마크, 입다가 등을 직접 제작하였으며, 조직원의 단결과 일체성을 고취해 민족을 떠받치고 나갈 일꾼들의 사명감과 의무를 체계화시켰다.

 

그는 1921년 43살 때에 국민대표회의 발기회를 결성하여 준비 위원회 회장으로 되었으며, 11월 25일에는 대한적십자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46살 때에 중국 여권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요코하마, 호놀룰루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하여 미국 각지의 순회강연과 흥사단 조직을 점검하면서, 동아일보에 “동포에 고하는 글”을 연재하였다.

그는 48살 때에는 한국 독립 유일당인 북경 촉성회를 결성하고, 다음 해에 길림 시에서 강연 중에 중국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52세 때에 흥사단 원동회를 개최한 후, 우파세력을 결집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다음 해에 흥사단 본부에서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54살 때에 대일 조선 통일 동방 회의를 열어 강령, 정책, 조직 등 토의로 결정했으나, 이유필 집에서 체포되어 안경호 편으로 국내로 압송되어 4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30년 독립운동에 겨우 4년 징역이라는 소감을 말하고, 항소를 포기하고 대전형무소에서 칠 공장에서 노역을 하였다.

 

그는 57살 때에 가출옥하여 대보산 자락에 은거하며 상태 산장을 짓고 강연회 대신 만찬회로 회집을 하였다.

그는 59세 1937년 65월 28일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전향을 거절하여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되었으나 간경화증과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으로 일제 재판 도중에 12월 24일 병보석으로 나와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는 1938년 3월 10일 80여 일을 입원했으나 60세 나이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지에 비석조차 없이 묻혔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은 일본의 신식 무기 앞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투쟁은 과거 동학농민봉기나 단발령 때의 의병부대와는 달라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군인, 헌병, 경찰이 거미줄처럼 감시 하에서는 독립협회 식의 단체로는 안 된다며, 비밀조직을 해외조직과 동시 추진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었다.

 

도산 안창호의 헌신적인 사상은 교포사회에서도 깊은 뿌리를 내려서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의 큰 힘이 되었던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은 경험을 통한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민주적이며 유능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평생을 나라를 위하여 독립과 조선 혁명을 위한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는 명예와 돈에 탐욕 없이 이성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이며, 성공보다 실패가 많아도 좌절과 몸부림 속에서도 올바른 판단과 분석으로 조국이란 대의 앞에 철저히 지켜온 사상을 오늘날의 정치지도자는 배워야 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해방의 기쁨도 보지 못하고 갔지만, 국민들의 고통 없는 희망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흥사단이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글을 마친다.

안창호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