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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후고구려 궁례는 누구인가?

후 고구려 궁예는 누구인가?

후 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 안 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 출신이었다.

그의 탄생설화는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에 태어나면서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서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였으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지자,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그는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후, 궁에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에서 출가하여 선종이라 하였으며,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졌으며, 지방은 호족들이 대도 하여 설치었다.

 

신라는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각지에서 들고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불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궁예는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있었으나 잘 대해주지 않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구 후,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면서 3,500명을 14대로 편성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군세가 매우 강해지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강해지면서 896년경에 임진강 연안 공격하여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고,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899년 (효공왕 3)에 송악 군을 수리하고 왕건을 보내어 소백산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하고 그해 7월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 등 30 여현을 얻었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궁예는 연호를 무태를 성책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을 평정하였으며, 911년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913년에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치었으나 왕건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어, 변복 차림으로 도망을 다니다가 부양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당하였다.

궁예는 891년 자립하여 후 고구려를 세웠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서 올바른 정치를 간하는 부인 강 씨와 그 소생의 두 아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을 꿔 뚫어 볼 수 있는 관심법을 터득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위협하거나 살해를 하였다.

 

“고려사”에서는 궁예는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혹독한 폭정으로 국민을 다스렸고 간사함과 위협으로 방책을 삼았으며, 요역이 번거롭고 세금이 과중하여 인호는 줄어들어 국토는 황폐하여졌다고 한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칭한 것은 미신적이라기보다는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볼 수 있다.

궁예의 불교적 성격은 미륵을 주 존으로 하는 법상종에 속해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