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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해상 왕 장보고에 관하여!

해상 왕 장보고에 관하여!

해상 왕 장보고는 신라 하대의 호족으로서 본명은 굴복 또는 궁파라고 불렸으며, 평민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물에 익숙하였으며, 청년기에는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서 생활을 하다가 서주 무령군에 복무하여 지방군벌로서 장교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 양자강 주변에서 산동성 동주지역일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 연안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중국과 신라, 일본으로 국제무역을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안 지역 출신인 장보고는 바다에 익숙하여 해상무역에 깊은 이해를 하였으며, 이 무렵 해마다의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하였다.

이들은 신라의 주민들을 포획하여 중국에다가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위협을 가했다.

장보고는 신라인에 대한 해적의 포획에 대한 분노를 함으로써,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는 독자세력을 키울 야망을 가졌다.

 

828년 (흥덕왕 3)에 장보고는 중국에서 귀국하여 신라왕에게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 오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하였다.

장보고는 왕의 승인을 받아 지방민을 규합하여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하고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으로 완도에서 청해진을 건설했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라는 신라국가의 관직체계가 없는 별도의 직함을 받아서 해적을 소탕하고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해상권의 토대로 당나라,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 나갔으며, 8세기 중엽 이후부터 신라무역상들이 많은 물품을 취급하도록 했다.

장보고는 무역활동과 외교교섭까지 시도하였으며, 840년(문성왕 2)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으며, 교관선을 보내 교역을 활발히 했다.

장보고는 신라, 일본, 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지원을 했다.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동해안과 신라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는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812년(헌덕왕 7) 신라에 흉년이 들어 일본으로 300여 명이 사회분화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빈민들이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가 떠돌아다녔다.

장보고는 빈민들을 규합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적인 활성화와 조직을 규합하여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지방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관여를 했다.

 

장보고는 정변을 틈타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 김우징을 왕으로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 군사로 삼고 식실 봉 이천호를 봉하자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세력이 왕성하여 해상 왕이라는 권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기로 하였으나 중앙귀족들의 반대를 하자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결국, 중앙정부에서는 한 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 투항한 다고 하여 장보고를 속여서 암살을 했다.

그 후, 장보고 아들과 부장 이창진에 의하여 청해진 세력이 얼마간 유지되며 일본에 무역선과 회사역을 보내어 교역을 계속했다.

결국, 염장과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궤멸 되었으며, 851년 (문성왕 13) 청해진 주민들을 벽골군(전북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