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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사상의 형성과정

단군신화

한국 철학사상의 형성 과정

 

한국 철학사상의 원류는 고대 부족사회에는 하늘, , , , , 등 신으로 모시는 원시종교이었다.

당시 부족사회에는 이러한 자연계의 초월적인 능력과 영혼이 있다고 믿음으로 신을 숭배하는 의식을 통해 평안을 기원했다.

고조선 건국 설화인 단군신화는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세계관과,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은 민족사를 통해서 사상적 기루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삼국시대는 중국으로부터 유학과 도교, 불교가 전래한 사상들은 토속적인 민간신앙과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냈다.

 

불교는 삼국에서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확립되면서 절대 왕권을 신성시하기 위한 정신적 가치 체계로서 뿌리를 내렸다.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는 종파의 화합과 통일을 강조하여 한국의 독자적인 불교사상을 창조했으며, 귀족 중심에서 일반 민중의 생활 속으로 확산이 됐다.

유학은 중국에 의해 한학의 도입과 함께 전래되어,, 국가적 차원의 교육기관을 통해 본격적으로 장려가 되었으며, 유학은 국가정치 철학의 성격이 강했으며, 충효 사상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도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민간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최치원은 유, , 선의 3개 사상의 조화를 주장했다.

 

고려시대에는 왕건은 삼국시대로부터 전래된 유교와 불교, 도교를 이어받은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었다.

유학은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으로 등용된 유학자들은 새로운 지식 계급을 형성하면서, 유학의 이념을 정치에 적용하고 사회개혁을 도모했다.

도교는 삼국시대보다 고려시대에 성행했으며, 불로장생과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면서, 민간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국가 차원에서 사원을 건립하고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으며, 도교에 근간을 두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여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은 고려말에 안향이 전래하면서, 불교의 타락에 대한 사상적 반발로 신흥사대부 사이에 확산이 되면서, 기존의 훈고학을 밀어내고 실천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시대는 숭유 정책으로 유학이 장려되었고 주자가례소학의 보급으로 민중의 생활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다.

조선시대의 유학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받들어 정치적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학자들은 정도전, 권근 등의 관학파 중심의 학풍과 세종 시대의 집현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훈구파가 있었다.

이외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을 인정하지 않고 향촌에서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학자들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등 사림파로서 경학에 치중하여 성리학 연구를 했다.

 

조선시대 사림파가 정치에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리학이 조선 유학을 대표하면서, 이론 연구에 심화가 되어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게 되어 한국 성리학은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는 주기론과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는 주기론으로 양립했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의 입장에서 차이가 붕당의 빌미가 되어 영남학파는 동인,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소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에서도 배타적인 학풍이 형성되었으며, 예법을 둘러싼 예송논쟁과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조선 사회는 16세기에 접어들어서 사회 각 분야에서 표출되면서 경제적 기반인 토지는 양반계급에 집중되면서 농촌경제가 흔들렸다.

 

조선 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성리학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당장에 휘말린 가운데, 서학이 전래가 되면서, 이전과 다른 합리적이고 신용적인 지식이 유포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학자들이 18세기 전후하여 실학이 나타나게 되면서 현실을 바로 인식하기 위한 관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올바른 것을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실학운동은 성리학의 실용주의적인 주기론에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농업 중심의 경세치용학파와 상공업중심의 이용후생학파, 고증적 실사구시 학파로 분류되었다.

 

경세치용학파는 농업의 각종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토지, 조세, 신분문제 등에 관심과 대안을 내놓았다. (이수광,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과 기술 진흥에 관심을 두고 청나라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인 북학파이다.(유수원, 홍대원, 박지원, 박제가 등)

고증적 실사구시 학파는 한국 역사의 민족적 전통에 관심을 두었으며, 금석학을 만든 김정희, 안정복, 한치윤 등이다.

19세기의 조선은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아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통사회의 가치관이 위협을 받게 되자 사상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민족을 구하고자 다양한 운동이 일어났다.

 

위정척사운동은 올바른 것은 지키고 사악한 것은, 배척한다는 명분에서 일체 외국 문물을 배척했다.

이 운동에서 성리학은 자주적 민족정신을 수호한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철학적 기반이 된 것은, 이황 이후의 주리론에 연원을 둔 이기일원론이다.

1890년대 이후 치열한 의병 운동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물질을 중요시하는 주기설의 신봉자들은 실학자들을 거쳐 초기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서양의 근대화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결국, 열강의 침략이 격화되고 농민층의 동요로 사회변혁을 전면적으로 요구하는 민중의 욕구가 강력해졌다.

이러한 욕구는 산발적인 농민전쟁으로 표출되면서, 최재우의 동학사상으로 전 농민적인 항쟁으로 비하되어 열강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민족 자주 수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