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한국의 시대별 정치과정

한국의 시대별 정치과정

대한민국 국회

1. 서언

 

한국의 시대별 정치과정을 전통시대의 정치와 근대, 현대의 정치로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한국의 정치는 역사적으로 전통시대의 왕조체제 중심 정치와 근대와 현대의 정치로서는, 서구 사조에 의한 민족주의, 민주주의적인 정치를 지향하면서 전개되었다.

전통시대의 정치는 역사적으로 왕조 중심의 정치이며, 정치권력의 정형화시키는 통치체 제이며, 근대 정치는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정치 상황이었다.

 

2. 한국의 시대별 정치과정

 

1) 고대정치

 

(1) 삼국의 귀족정치

 

국가의 조직의 확대 강화와 권력의 집중화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연맹 왕국으로 변질되어 나갔다.

연맹 왕국의 국가조직은 권력의 집중화 경향에 따라 변화되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 중심세력과 남쪽은 백제와 신라가 대두되어 삼국으로 정립되었다.

고대 국가체제는 연맹 왕국 체제에서 새로운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로 발전하면서, 통일적인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불교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율령의 반포로 국가의 통치를 규정하는 성문법의 성격으로서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때는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중앙 집권적 귀족 국가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법흥왕 때에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의 정치는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초까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 아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왕과 귀족이었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지배층은 왕을 포함한 귀족정치로서, 고구려는 14 관등의 체제이며, 백제는 8개의 성(姓)의 체제이며, 신라는 골품제도로서 성골과 진골 그리고 육두품, 오 두품, 사두품의 귀족들이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정치에서 고구려는 명문 귀족 출신인 연개소문과 광개토대왕이 있었으며, 신라는 진흥왕과 같은 영주가 나타나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영토 평창을 이루었다.

(2) 통일신라의 왕권 정치

신라는 삼국통일 주역으로 대업을 성취하여 정치적, 사회적 토대의 발전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탁월한 정치적인 구실을 하였다.

김춘추는 화백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김유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 후, 문무왕과 신문왕은 무자비한 귀족 숙청을 통하여 세력의 기반을 굳혀 화백회의는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하면서 관료제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전제왕권의 체제하에서 성덕왕 때에 정치적 안정의 바탕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그 후, 전제왕권의 시기가 끝나고 진골귀족들의 연립 정치에 의한 변화 속에 골품제 대신에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가 형성되었다.

 

2) 고려시대

 

(1) 문벌 귀족정치

 

왕위 쟁탈전은 진골귀족 대신 지방 출신의 호족이 새로운 주역이 되어 해상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군진 세력의 배경으로 대두되었다.

또한 촌주의 토착적 기반으로 성장한 호족들은 신라의 통치력을 부정하고 성주와 장군으로 독립된 지위를 확보하였다.

전형적인 호족 출신인 고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정통적인 통일 왕권을 확립하였다.

고려의 새로운 중앙집권적 통일 체제를 성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고려의 정치에 바탕을 두었으나 유수한 문벌 귀족이 대두되었다.

고려사회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문벌귀족으로서 새로 정비된 관료체제와 통치체제는 귀족제의 요소가 많았다.

 

(2) 무신 정권 정치

 

고려의 귀족정치의 이념은 유교에 기반을 두는 문신이 주도한 정치였으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에 이어서 문신 정치에 반발한 무신 난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뒤흔들리게 되었다.

고려의 귀족정치의 기본 틀의 도전을 받게 되고 문신 귀족들을 제거하면서 정중부의 중심으로 무신들의 중방을 통하여 무단정치를 하였다.

그 후, 최충헌의 대두로 안정된 무신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최 씨의 무신정권이 4대로 60여 년 동안 계속되면서 약 100년간 무신정권기가 지속되었다.

 

(3) 부마국 체제와 권문세족 정치

 

최 씨 정권이 전복된 다음부터 몽고의 정치적 영향으로 무신정권에 충성하던 삼별초 난이 일어났으나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으로 평정을 하였다.

그 후, 고려의 태자가 원나라 세조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른 충렬왕의 고려는 원의 부마국 체제가 되어, 고려는 독립왕국의 형태로 유지하면서, 부마국 체제로서 정치적 제약을 받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성립되어 경제적 기반 확대와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사회적 모순을 증대시켰다.

권문세족은 다양한 형태로 권력과 결탁하여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과 만호부의 관직을 받은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고려는 원의 세력에 의하여 입성 책동으로서 고려의 체제를 해체시키고 원의 지방 행정단위의 성으로 편입시키려 했으나 고려의 저지운동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3) 조선시대의 정치

 

(1) 조선 건국 정치

 

고려 후기에 중국의 원이 쇠망하고 명이 들어서면서, 고려는 군사행동으로 원에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고 국가의 자주성을 수복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신흥 사대부의 세력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대외 관계의 긴장 속에 변화의 시대에서 무장들의 활약이 나타나게 되었다.

동 북면 출신의 신흥무장 이성계의 친병 조직을 통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각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과 신흥 사대부 세력의 급격한 부상을 하게 되었다.

정도전, 조준 등 사대부 개혁론자들의 주도로 전제개혁 운동이 전개되어 과전법의 성립으로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신흥 사대부 중심의 새 경제 질서가 수립되었다.

이성계의 조선 왕조의 개창으로 신흥 사대부와 신흥무장의 정치적 성장과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어 사상적으로 억불 양유를 표방하여 대외적으로 명에 대한 사대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반이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고려시대와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을 주도적 영향을 한 사대부들은 새 왕조에서 문반과 무반의 양반 관직을 차지하고 관리로서 특권을 향유하였다.

조선의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최고기관인 의정부와 중추적 정부기관인 육조로서 국가의 모든 정무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소관이 되었다.

 

(2) 사림정치와 사화

 

조선 건국 후, 약 100년 동안 양반관료정치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어 사회적 안정과 부국강병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사림 세력이 성장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 훈구세력과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거듭하다가 사림 세력을 이루는 신진의 사 류들이 화를 당해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사회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 선조 때에 서원의 발달과 향약의 실시로 사립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여 선현에 대한 봉사와 교육으로 향약의 각 지방까지 확대 보급을 하였다.

사림 세력의 정치는 공론을 중시하여 지배층의 여론을 널리 수렴해서 정치에 반영을 시켰으며, 합의제에 입각한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비변사 설치로 중신들의 합의에 따라 군국 기무를 결정하여 정치 운용에서 독단적인 것을 배제하고 도학정치를 지향하였다.

그 후, 당파 간의 서인과 남인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정세는 더욱 복잡하고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 더욱 가열하게 되었다.

 

(3) 세도정치와 민란

 

조선시대의 붕당 간의 대립은 정치에 커다란 불안을 초래하였으므로 경쟁을 지양하려는 탕평책으로는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나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천주교도들의 혹독한 박해를 가한 신유사옥 발생한 후에 김조순이 왕비의 부친으로서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안동 김 씨의 일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실시되어 정치발전을 후퇴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세도정치는 정치 기강의 극도 문란과 국가 통치체제도 해이한 상태에서 양반 지배층이 불법적인 수탈을 자행하게 되었다.

영조 때에는 대민 시책으로 균역법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조세부담을 경감시켰으나 세도정치로 3정 문란으로 지방관들의 대민 수탈이 자행하였다.

그라나 몰락한 양반들이 속출하면서 잔반으로서 불만세력으로 이루었으며, 농민들이 부를 축적하여 지위를 향상하고 노비를 해방했다.

사회적 변화 속에 세도정치로 대민 수탈이 역사적 발전의 대세에 역행하자 민란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최초의 대규모의 민란은 순조 때에 평안도 지방에서 잔반들이 주도 아래 지역의 상인과 농민들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반란으로 일어난 홍경래 난이 있었다.

뒤이어 철종 때에 경상도 지방의 지방관의 악행과 수탈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킨 진주민란이 일어나서 조선 조정에 커달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민란은 세도정치의 반항과 조선 양반 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으나 고종 때에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비봉 되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과감한 개혁정치를 하였다.

 

4) 근. 현대의 정치

 

(1) 전제통치의 정치

 

조선왕조의 후기 1800년대 초의 정치적 특징은 아시아적 전제 군주국가적 속성과 일종의 준 관료제적 체제이었다.

아시아적 전제 군주제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의 왕조체제와 통치구조의 위계 성을 체계화하여 국왕이 절대적 권력을 가졌다.

국왕의 권력은 민간인 관료체제, 무력적 군사체계, 종교적 이데올로기이었으며, 준 가산 관료제는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 사이의 미분적인 현상으로서 국왕이 경제적 지배권을 갖는 것이었다.

 

(2) 제국주의 정치

 

대원군이 축출되고 국왕 친정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 민비 세력의 통치가 강화되었으나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할 수 없도록 내외적인 도전을 받았다.

외부의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반도의 진출이 가열화 되고 고종의 통치는 외적인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데서 탈출구를 모색하였다.

청에 의존했던 조선왕조의 권력은 일본,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의 침탈의 대상으로서 식민지 전략의 가능성을 예고되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로 근대 국가로 등장하여 조선에 진출할러는 식민지하의 일차적인 대상지가 되었다.

강대국가의 도전에 직면한 조선왕조는 아무런 구체적인 대응책이 없었으며, 이항로 중심의 척사 위 정론자들과 개화파의 주장이 있었으며, 농민들의 반제, 반봉건의 동학 사상적 대응 양식이 논의되었다.

일제의 서구 사상과 문물에 대한 강력한 배척을 주장한 성리학적 전통사상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였다.

농민층에 의한 주장은 동학사상으로서 정치적으로 전통적 주체의식의 강력한 반체제적 저항의식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침탈에 저항하는 민족 투쟁이었다.

조선왕조체제의 지배세력은 정권유지에 관심을 두고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며, 심지어 일본의 지원의 힘을 빌리려는 정권 말기의 성격을 보였다.

결국, 조선왕조는 국내 민중의 도전에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여 외국의 제국주의 세력을 불려 들여 그 힘으로 통제권을 행사했다.

왕조 말기에는 조선은 제국주의적 열강의 지배체제의 예속의 목전에 두게 되자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반 식민지적 애국운동이 전개되었다.

식민지로 전락되어가는 국가에 대한 식민지적 열정이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척사파의 애국운동은 왕조체제의 억압에 의하여 활동이 탄압을 받았다.

일본은 1910년 조선왕조를 강압적으로 식민화되면서 일본의 지배세력인 군국주의자들과 조선왕조의 지배세력 중에 상당수가 야합 하에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일반 민중을 식민화로 만들었다.

 

(3) 일본 식민지의 정치

 

1910녀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통치를 받았으며, 일본의 통치는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중요 관직을 일본인으로 충원하고 협조하는 한국인을 훈작과 상훈을 제공하여 명예와 예우를 제공하였다.

. 무단통치의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헌병경찰 제도를 통하여 군국주의적인 억압을 자행하였다.

조선 식민통치는 통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철저히 조선의 민족적 일체성과 독자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의 한 속령으로 하층민을 강제 편입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은 조선인의 역사교육 금지와 언어, 문자에 대한 말살정책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시켰다.

1919년 3. 1 운동은 보수적인 장로 세대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최초의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의 민족운동은 좌우의 양대 세력으로 분리되면서, 보수파의 민족운동은 민중계몽에 의한 민족적 역량 구축과 식민지 통치자들에 대한 투쟁이었다.

좌파의 경우에는 민족 투쟁과 계급투쟁을 동일적인 차원에서 수용하여 일본 투쟁보다 민족내적 계급모순의 극복에 치중하여 민족 간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그 후, 우파는 민족투쟁 방법이었던 민중계몽과 인력양성에 주력했으며, 좌파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직접 계급투쟁의식을 고창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지하에 잠입하였다.

 

(4) 미군정기의 정치

 

1945년 일본 패망과 한반도 미군의 진주하여 국내 상황은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혁으로 혼돈되었으며, 국내의 각 정파세력들 사이에 격심한 분열이 생겼다.

국내의 정치세력은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송진우와 김성수 중심의 한국 민주당 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으며, 이들 정파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져 정치는 혼탁하였다.

이후,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미주지역의 이승만 계, 중국의 김구 계, 소련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국내 정차의 갈등을 상승시켰다.

이러한 정차 간이 대립과 분열, 갈등은 민족독립의 가능성과 국제적인 호기를 상실시켰으며, 미국과 소련의 극동정책에서 의견 차이로 38도 선에 의한 국토가 분단이 되었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에 협력했던 보수우파 세력의 지원을 받아서 미 군정청을 개설하였으며, 미 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 합법적 정부라고 선언하여 미 군정청의 통치는 억압과 혼란을 가중하게 심화시켰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분단체제의 형성으로 약 3년간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의 점령정책은 민족주의 세력의 소진과 사대주의 세력의 발흥을 조성시켰다.

남한에서는 친미주의자들의 결집이 되었으나 북한은 친소 공산주의자들의 철저한 통제가 자행되었다.

남한의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미주 유학생, 국내 보수우파, 일본 총독부 기관에 근무했던 친일세력 등이 핵심으로 형성되었다.

해방 후의 논의된 중요 정책은, 친일파 제거, 토지개혁, 정부 수립 등이었으며, 미군의 남한 점령정책은 한국 민족운동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선거와 7월 헌법 제정,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5) 대한민국 건국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념은 정통적 민족세력의 가치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우파 미족 세력과 국외의 상해 임시 정부계의 법통을 계승하고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유일 합법정부로서 법통을 강조하고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전체 민족 성원의 열망을 총결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헌법에서는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정치형태는 공화제를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지향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및 경제발전을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를 지향했다.

5. 10 선거로 상해 임시정부계 인사의 불참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 좌파의 선거 거부 가운데 이루어졌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권력 구조화 과정은 친일파 세력의 완전한 숙정을 단행하지 못했으며, 식민지 성격의 근원적 변혁을 못하고 미국의 영향을 차단시킬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행정체제는 민주주의적인 성격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하여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정치는 1960년 4월 19일 혁면에 이르기까지 경직적으로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