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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전봉준의 누구인가?

전봉준은 누구인가?

전봉준은 1855년(철종 6)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의 향교의 양 고리 장의를 지낸 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본관은 천안, 호는 해몽이었다.

그는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고 불렸으나 뒷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 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하자,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계획에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안정된 생업이 없어 집안이 가난하여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 하였으며, 방술을 배워서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다섯 명의 가장으로서 세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었으며 동네서 아이들을 글을 가르치는 훈장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890년경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가 동학의 입교 동기는 동학은 경천수심의 도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으며,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로서 여러 주. 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그는 한재가 들어도 면세하지 않고 국세를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서 불효, 음행, 잡기, 불목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관아에 가서 진정을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1894년 1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를 하였다.

이러한 고부민란으로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으며,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창고에서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을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정부는 조병갑을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하고, 용안 현감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동 학교도들에게 돌리고 이들을 체포와 분탕, 살해로 악랄한 행동을 자행했다.

1894년 3월 하순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전봉중은 동도 대장으로 추대되어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 뜻을 밝혀 격문을 작성하여 각처에 보내면서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해 진격하여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 흥덕, 고창을 석권하여 파죽지세로 완전히 장악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창의문을 발표여 동학농인의 봉기한 뜻을 재천명하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 영광, 함평, 부안 일대를 진격하였다.

4월 24일에서 4월 27일까지 진주성을 점령하자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외 병차 입을 요청하자 정부는 원병 요청을 청국에 하였다.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 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텐진 조약을 빙자하여 조선에 진출을 하였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송계훈이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전라도 각 지방에서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후,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여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 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손병희의 주력부대 10만 여명은 공주를 공격을 몇 차례 하였으나, 11월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였으며, 나머지 농민군은 마지막으로 금구 싸움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이 되었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 강원도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었으며,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져서 서울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귀에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