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하여!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 가까워지면서, 지배계급은 문약에 빠지고,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국방에도 관심이 약화되었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전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내통일을 하여, 제후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체제를 반전을 기하고자 대륙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도미는 대마도 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하면서, 명나라 정벌을 위하여 조선 통과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으로는 이를 거절하였다.
조선 조정은 당시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1590년(선조23)황윤길을 통신사, 김성일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가을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가 있어 침략의도가 명백하였음에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이 없다고 한 이면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도요토미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왜병 침입의 급보를 접한 조정은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 일은 상주에서 패하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게 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하였다.
왜군이 상륙한 지 20일 만에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어 북진한 왜병은 다시 6월 13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카토는 함경도 끝가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을 때에, 인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을 편성하여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 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졌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에 거북선을 이끌고 도처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 적수군의 주력함대 73척 중 59척을 노획, 격파하고, 9월 1일 부산포 해전에서 적선 100척을 격파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을 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하여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북상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였다.
조선의 관군이 외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 조헌, 곽재우, 김시민 등 의병과 묘향산 노승 휴정의 격문을 팔도의 승려에 발하여 유정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명장 조승훈이 5,000명의 군사를 보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를 하자, 심유경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하면서, 이여송에게 4만 3,000명을 지원하게 하였다.
1593년 1얼 8일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추격하려고 서울로 향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권율 장군에게 패배를 하였다.
임진왜란의 3대첩은 행주산성, 김시민의 진주 싸움, 이순신의 한산섬 싸움이었다.
벽제관 전투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주둔하면서, 심유경을 왜군에 보내 교섭을 하였으나 도요토미의 무리한 조건으로 결렬되었다.
1597년 1월 1일 도요토미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재침 공한 것이, 정유재란이었다.
왜군의 수군은 이순신이 모함으로 옥에 갇혀버리자 7월 15일 조선의 수군은 다대포와 칠 천양에서 조선의 수군을 섬멸시켰다.
일본군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총반격을 가해 9월 6일 소사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전세를 만회하였다.
조정에서는 수군이 패하자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자, 그는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여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하여 31척을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외군은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철수하자 이순신은 노량진 격정에서 외선 200여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하였으나 전사를 하였으며, 이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에서는 병제 개편과 무기를 개량하고 훈련도감 설치, 삼수병의 무예훈련, 비격진천뢰와 화자 발명, 조총과 불랑기 등을 제조하였다.
“한일의 무익한 전쟁으로 두 민족 간의 원한 관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