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유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거나 급진파가 선봉에 서서 사회개혁을 실현하는 혁명이 아니었다.
이러한 혁명은 일본의 전통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서양 제국주의의 도전에 대응하고자 일본 사회, 정치, 경제를 근대화하려는 진정한 혁명이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는 메이지 덴노가 죽은 1912년까지를 의미했으나, 일본이 세계적 군사 강국이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대구국이 되면서부터 20세기 이후에도 메이지 유신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원인은 서양의 평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가 인도의 쇠락을 보았으며, 19세기 후반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노력했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기술적, 사회적 변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은 근대화로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본질은 계급 혁명이 아니라 사무라이 계급의 내부 개혁이었으며, 사회 하층이 상층에 반기를 든 혁명이 아니라 사무라이 계급이 스스로 사회적 특권을 적극 부정하는 과정이었다.
그 층에도 주로 하급 무사들이 주도한 유신으로 봉건 막부 체제가 붕괴하고 사무라이 봉록이 철폐되었으며, 보편적 평등에 기반한 사회가 탄생한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 토대는 지지자들 사이에도 매우 다양하며, 일부는 외국인 배척을, 다른 일부는 개방을 주장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덴노 통치 체제 복원을 다른 일부는 막부 타도를 원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보수파인 도쿠가와막부 대 개혁파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간의 대립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념이 서로 뒤섞인 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시점과 상황에 따라 발생한 연쇄 사건의 결과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무라이들 사이에 일본을 개편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시급히 변혁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메이지 유신은 일본 내부 개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 군대화 결로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라고 했다.
결국, 메이지 정부는 일본을 주권 국가로서 재정립하고, 일본 전역을 직접 지배했으며, 미국 및 기타 서양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고 했다.
특히, 부국강변(富國强辯)을 추구하며 식산흥업을 지원해 전면적 변화를 단행하면서, 근대국가로서 해외 천연자원과 시장을 개척하여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20세기 중국을 근대화한 민주주의자 장제스는 일본이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고 칭찬했다.
이런 평가는 무사도와 자주적 개혁 능력을 존중한 것이었으며, 20세기 초반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한 다음부터는 주변 국가들은 메이지 유신을 처음으로 높이 평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