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에 관하여!
이자겸은?~1126년(인종 4) 고려의 외척 권세가로서, 본관은 경원(인천) 호부낭중을 지낸 호의 아들로서, 이허겸의 외손녀가 현종의 비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귀족 가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 때부터였으며, 이자겸의 누이 장경 궁주는 순종의 비가 되었고, 부인은 해주 최 씨로 수상을 역임한 사추의 딸이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배경으로 그는 음서로 진출하여 파격적으로 합문지후로 제수를 받았다.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로 들어가면서 소성군개국백까지 봉작되면서 권력의 핵심에 참여했지만, 정계를 흔들 위치는 아니었다.
예종이 죽은 뒤에 외손인 인종이 그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오르면서, 서령소성후를 책봉받아 인신(人臣)으로 최고 직을 오르면서, 반대파를 역모로 몰아 왕의 작은 아버지 등을 살해와 유배를 보냈다.
“고려사”에는 귀족관료 내부 간의 균형이 깨어지고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그는 재물과 권력에 지나치게 욕심이 많아서, 남의 토전을 강탈하고 권세를 부리며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경원 이 씨 이외에 다른 성씨에서 왕비가 나오면 권세와 총애가 분산될까를 염려하여 왕에게 강 청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토대를 쌓고, 사원과 긴밀한 유대로 정계를 마음대로 하여 왕권에 대한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송나라에 토산물을 바치는 지군국사로 자칭하며, 왕이 자기 집에 와서 조칙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날짜까지 잡았다.
지군 국사는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 인신을 대유 할 수 있는 직함이었다.
그의 이 같은 전횡에 왕이 꺼리게 되자, 내시 감찬, 안 보린, 지녹연,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등은 이자겸과 척준경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궁궐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척준경 동생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인 내시 척순 등을 살해한 것이 “이자겸의 난”의 발단이 되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이자겸과 척준경은 병졸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자 이에 놀란 왕은 자신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이자겸에게 선위를 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재종형제간인 이수와 귀족관료인 김부식 등이 반대로 저지되었으나 그는 왕을 자기 집으로 기거하게 하고는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를 하였다.
그는 군신관계를 요구한 금나라에 대해서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권력유지를 위하여 사금 책(事金策)을 결정을 하였다.
그는 왕위에 미련을 가지고 인종을 독살할러고 했으나,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겨우 왕은 화를 면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종의 밀명을 받은 내의 최사진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떼어 놓는 데 성공함으로써, 척준경에 의하여 거세된 이자겸은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