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정사 빛은 동쪽에서 밝아온다. 16
빛이 오면 어두움은 사라지듯
밤을 지새우며 울던 괴로움은
강둑이 허물어지듯 무너지면서
장밋빛 희망으로 마음속 채운다.
1994년 DJ는 정계 복귀하기 위해 독일에서 돌아와서 남북통일 및 민주화에 관련된 연구 목적으로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이러한 재단설립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하나였다.
추운 겨울날 새벽녘에 소택 형과 나는 DJ를 만나기 위해 동교동 그의 집 앞의 공사판 모닥불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대문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렸다.
집 대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면, 비서들은 별관에서 기다리게 하면서, 면접순서에 따라 그를 만나게 했다.
그는 소택 형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경상도 지역의 정당 중책을 맡기면서, 동진정책을 펼치는 전략적인 술수를 썼다.
그에 대한 소택 형의 정치적 기대와 존경하는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며, “빛은 동쪽에서부터 밝아온다며,” 그가 가는 어두운 가시밭길에도 한 올의 빛이 되겠다는 순수한 생각을 가졌다.
아태 평화재단에서 제1기 학생 모집이 있게 되자, 입학하자면 유명정치인의 추천을 받아야 입학할 수 있었다.
소택 형은 추천받아 주겠다며 입학하라고 했으나, 현직에 있으며, 등록하게 된다면, 정치권력이 문제 삼아서 직장에서 근무를 못 할 것 같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정치권력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학문연구를 한다는 의미에서 제6기에 등록하여 수료했다.
그 후, 인천에서 지역구 선관위의 책임자로 근무할 무렵에 야당 정치인들과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사립 유명 대학교 자비로 정당 정책 과정을 연수할 기회가 있었다.
애틀란타에 있는 Emory University에서 상당 기간을 연수를 하기 위하여 미국 입주 비자와 면접 심사 과정이 너무나 복잡했었다.
모든 것이 통과된 후에 미국 항공기를 타고 태평양의 넓은 바다를 건너서 록키 산맥을 넘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너무 편협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Emory대학의 캠퍼스는 강남땅덩어리보다 넓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교내에서 버스가 다니고 기숙사는 호텔식으로 먹고 자고 했다.
대학교의 교육 과정은 교수가 설명을 하면, 다시 한국말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전 과정을 수료했다.
젊은 날, 나 자신이 이런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서울시 송파구 선관위가 병으로 새로 신설되면서, 나는 인천에서 송파구 병의 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관례 적으로 지역 선거구 간의 교체점검이 있어 나는 직원 1명과 서초 지역구에 교체점검을 나갔다.
그때 당시에는 여당은 YS가 정치권력의 최고 위치에서 있을 때로서, 강남은 보수 텃밭인 서초에서 정치권력의 최고 핵심인 K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지게 한다는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교체 점검하는 과정에서 그는 유사 기관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을 비밀히 동원하여 전화로 선거운동을 한 것을 선거법 위반으로 적발했다.
교체 점검반의 위반 상황이 적발되자 사방에서 같이 간 단속반 직원에게 압력을 가게 되자, 그는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압력으로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며, 바로 직접 공문서를 기안하여 선거법 위반 상황을 고발한다며 위원장의 결재를 받아서 사무실에 돌아왔다.
사무실 돌아온 나에게 교체점검이 해체됐으니 원래 선거구로 복귀하라는 상급 기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선거법 위반에 관한 업무 처리할 권한이 없어진 나는 바로 당해 선거구 국장에게 인계하고 송파병 선거구로 돌아왔다.
즉시, 송파병 선거구에서 안동을 선거관리 위원회로 발령을 내면서 말로는 승진시켜 준다고 했지만, 정치권력의 압력에 의한 전보라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난 나는 상급 기관에 화풀이하고 나서, 나 홀로 안동으로 내려갔다.
양반 도시 안동으로 내려온 나는 지난날의 불쾌한 감정과 나쁜 생각을 없애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했다.
가끔 위원회의 끝나면, 위원장과 직원들 함께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면서, 나의 애창곡 “아침 이슬”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