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의 정치적 리더십
목차
1. 생애
2. 정치적 리더십
1. 생애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부친 서광언과 모친 성주 이 씨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71년 충남 대덕 군의 재당숙 서관하의 양자로 들어가서, 서울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1882년 별시 문과에 최연소 급제하여 교서관에 근무를 하였다.
1883년 김옥균의 뜻에 따라 일본 도야마 육군 학교로 유학하여, 1884년 기본과정을 수료한 후, 생도들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1884년 조련국사관장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도망을 하였다.
1885년 박영효, 서광범 등과 미국으로 가서 1년간 막일을 하면서 영어공부를 하였으며, 1886년 헤리 힐맨 아카데미에서 2년간을 공부를 하였고, 1888년 미 육군 군의 감, 도서관 사서로 취직하고, 코크단 과학학교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였으며, 1889년 콜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사를 취득하였다.
189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다음 해에 가필드 병원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의사면허를 취득하여 군의 감 의학연구소에서 의학연구를 하였다.
1894년 가필드병원 병리학, 세균학 실험실 책임자를 한 후, 콜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세균학 조교수로 역임하였으며,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1년 만에 귀국을 하였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배재학당 목요강좌를 1년간 진행하였으며, 독립협회를 창립, 독립문 정초식, 협성회를 결성하였으며, 1897년 독립관 완공, 독립협회 토론회, 독립문을 완공하였다.
1898년 1차 만민공동회 개최, 2차 도미하여 군의관으로 미국, 스페인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였다.
189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 위스타 연구소 연구원, 1904년 디머 엔드 제이슨 상회 공동경영,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1차 한인대회 주최, 미주 선전기관인 한국 통신부 설립 및 책임, 필라델피아 한국 친우회 결성, 미국 영문 잡지 “한국 평론” 간행을 하였다.
1921년 영문소설 “한수의 여행” 출간, 구미 위원부 임시위원장 임명, 1922년 “한국평론” 발행과 종간, 1925년 유한 주식회사 필라델피아 직접 경영, 1927년 병리학 전문의 자격 취득하여 병원 근무와 논문 발표를 하였다.
1936년 신한민보에 활발한 투고, 1945년 훈장서훈, 1947년 매주 금요일 라디오 토크 “국민의 시간 강연”, 1948년 3차 도미하여 병원 지료를 하다가, 1951년 1월 5일 노티스 타운 소재 병원에서 사망을 하였다.
정부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가 되었다.
2. 정치적 리더십
서재필의 젊은 시절의 꿈은 김옥균의 여향을 받아 일본군사학교에 유학을 하였으며,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군사 책임을 맡은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국민들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사회개혁과 국민의 자주권 회복운동에 헌신을 하였다.
또한, 그는 배재학당을 교육기관을 통하여 학생들과 청년들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 시민집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도록 지도하였으며, 이들의 젊은 세대를 국가의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의 일생동안 생각과 삶은 독립운동은 물론, 언론 및 의학 경제발전,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실질적으로 민족의 선구자이며 나라를 위한 계몽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사상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평생의 삶은 자유민주주의의 지향성과 실천으로 계몽, 교육, 언론, 독립운동으로 국민을 위한 시민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책략이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민 스스로 과정과 수단자체를 민주화로 결정하도록 하여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이었다.
그는 젊은 청년시절부터 김옥균의 개화이상과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로서 평생을 존경하여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 준비와 거사에 동참하여 위로부터의 혁명을 일으킨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김옥균과의 인간관계와 정치적으로 결별을 하고, 미국에서 법률가와 세균학 의학교수가 되었으며,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을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부터 건립계획을 세운 것은, 프랑스의 파리 시내에 312미터 높이의 에펠탑을 세워, 독일에 패한 수치를 씻어내는 프랑스 대혁명정신을 정통 국가로서 강조한 것에 자극을 받은 영향이었다.
그의 정치적 목적으로 시민을 대상으로 몇 가지 리더십을 발휘하였던 것을 보면,
첫째, 시민단체를 결성하여 나라에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를 통한 효과적인 캠페인 운동으로 모금하여 독립문을 건축하였다.
둘째,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시민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진 새로운 정치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계몽운동을 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충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셋째, 배재학당을 세워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교육을 통하여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정치적 목표를 세운 것이었다.
넷째, 협성회를 창립하여 매주 토요일 마다 정기 토론회를 열면서,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도록 사회운동을 지도하였다.
다섯째, 정치적 리더십은 배재학당, 독립협회를 넘어서 관 무협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에게 애국계몽 단체로서, 시민사회의 공론장이 되도록 지도하였다.
결국,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미국에서의 경험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적 개인의 활동이 공적영역으로 지도하는 민주적인 지도자로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아래로부터의 국민들의 혁명정신을 가지도록 헌신한 정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