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작품
1. 미켈란젤로의 생애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카프레세에서 로드비코 디 리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와 프란체스카 디 네리 미니아토 델 세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카프레세의 산조반니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라틴어 학교에 입학을 했으며, 그 후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고, 해부학을 공부를 하기도 했다.
1494년 그는 피에르 2세의 부름으로 시장관저로 갔으나 10월 중순에 프랑스군과 메디치 가에 대한 피렌츠가의 반감을 피해 떠나면서 볼로나를 거쳐 베네치아 그리고 다시 볼로냐로 도망을 했다.
그는 알도브란디의 의뢰를 받아 성 페트로 나우스, 성 프로쿨루스, 빛을 나르는 천사 등을 제작하였다.
그는 1498년 산디오니시오 추기경과 피에타 제작계약을 체결하여 다음 해에 완성을 했으며, 1501년 피렌체로 귀환하여 다비드 제작을 착수하였다.
1504년 다비드를 완성하고, 피랜체 정부로부터 벽화 카슈나의 전투 제작의 의뢰를 받고, 다음 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어 묘비 건립을 위한 조각가로 위촉되었다.
1506년 율리우스 청동상 제작에 착수하여 2년 뒤에 완성했으며,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위해 로마로 소환되어 벽화제작에 착수를 했다.
1512년 시스티나 성당의 궁중 천장이 메디치 일가의 귀환직후 완성되었으며, 1514년 십자가 예수 착수되었다가 파기되었다.
1529년 국방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에 그는 비밀리에 메디치 묘비 작업을 착수를 하고, 1531년 줄리아노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뒤에 완성을 했다.
1535년 바티칸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1541ㄴ녀에 최후의 심판을 제작 완성하였다.
1547년 성 베드로 성당의 건설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1550년 피에타를 제작했으며, 1553년 자서전 아스카니오 콘디비의 미켈란젤로의 생애가 출판되었다.
그는 1559년 피렌체의 성 요한 성당설계를 위촉받았으며, 1563년 피렌체 아카데미 예술원 명예원장으로 임면 되어 1564년 2월 14일 89세로 사망을 하였다.
2. 미켈란젤로의 작품
미켈란젤로는 어는 작가들보다 자신의 작품 속에 자신의 운명에 맞서서 싸워서 이겼다는 절절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거의 없어도 존재와 사물의 조화, 생명과 그의 법칙 사이의 조화가 전혀 결여된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인생의 비참함과 마음이 가난함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비겁한 이상주의자들을 싫어했다.
그는 거창한 말로 사람들을 환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사람들과 영웅적 표현을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것뿐이었으며 항상 고독뿐이었다.
그는 언덕의 작은 떡갈나무와 물결처럼 굽이치는 올리브의 은빛 베일에 덮이어 보랏빛 하늘과 더불어 아름답게 부각된 도시 피렌체를 사랑했었다.
그는 25세 떼에 로마에 머물던 시절에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여 제작하였다.
이 피에타 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잇는 유일한 작품으로서 마리아가 두른 어깨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501년 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서 4년동안 다비드, 마돈나, 두 점의 대리석 마돈나 원형부조 마돈나 도니, 카슈나 전투의 소묘 등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다비드 상은 완성하기 위한 준비는 40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말에 시장이 제작실에 찾아와서 코의 높이가 좀 높다고 하자 그는 대리석 부스러기를 가지고 가볍게 끌을 놀리면서 돌가루를 조금씩 떨어뜨리며 작품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완성되었다고 했다.
그는 1483년 30세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동굴의 성모를 그리고 1498년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서 성당 벽화 최후의 만찬을 그려서 유명해졌다.
1503년 3월 피렌체에서 모나리자 제작을 착수하였으며 1506년 프랑스 치하에 밀라노에 초빙되어 루이 12세의 궁정화가로 위촉되었다.
1504년 8월 그는 카슈나의 싸움의 그림을 의뢰받아 1년 후에 완성되었으며, 1505년까지 두 개의 작품인 마돈나, 원형의 릴리프를 만들었다.
그의 정열과 의지를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은 모세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포로이며 일명 노에는 1546년 스트로치에게 보내졌으나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간 이 피렌체의 공화주의자로부터 프랑수와 1세에 바쳐졌다.
그는 평생 혼자로서 고독한 사람이었으며, 1544년과 1548년 두 차례의 중병을 앓을 때에 최후의 빛을 발했다.
그에 대한 자유로운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였지만, 그의 인생은 짧았지만, 예술은 영원한 것이었다.
그의 예술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면서도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는 오직 신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