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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왕 고종에 관하여!

국왕 고종(高宗)에 관하여!

명성황후

고종은 1852년(철종 3)~1919년 조선 제26대 국왕이며, 재위는 1864년~1907년, 아명은 명복, 초명은 재황, 후에 형으로 개명, 자는 성임, 후에 명부로 개자, 호는 성헌이다.

고종은 흥선군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 씨이다.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 방 소재의 흥선군 사제에서 출생하여, 1866년 9월 여성부원군 민 치록의 딸과 결혼한 명성황후이었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흥선군과 익종 비인 조대비와의 묵계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이 국왕이 된 원인은 순종,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세도 정치를 한 안동 김 씨는 철종이 후사가 없자,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이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이때에 안동 김 씨 세도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시정무뢰한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익성 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했다.

국왕은 12세 어린 나이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을 하게 했다.

 

1873년 고종은 서무친재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이란 성명을 환수하고, 통치대권을 장악하는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을 했다.

민 씨 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척사양이 정책과 달리 안으로 대의 개방의 움직임과 밖으로 근대 일본의 국교요청을 받아들였다.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새로운 국교관계를 가지자 구미 열강과는 차례로 조약을 맺어 통교관계를 가지는 개항정책을 실행했다.

고종과 민 씨 정권은 개항 후,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계속 파견을 했다.

 

개화문명을 수용하는 정책을 틈타서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침투해 오자 국내에서는 개화와 수구의 두 파의 대립을 하게 되었다.

1881년 조선책략의 유입, 반포의 계기로 위정척사 파는 신사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 씨 정부를 규탄했다.

이때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 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가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했다.

민 씨 정권은 이 사건으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을 했다.

그러나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 간의 알력으로, 1882년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의 세력으로 대권을 장악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 때는 개화세력의 압력으로 고종은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를 계기로 청국 군과 일본군이 진주하자 자주권이 큰 손상을 입었으며, 임오군란 이후에는 민 씨 정권은 국정을 농단하고, 동북아시아 정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안으로 동학농민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문제로 인하여 교정하게 되었으며, 대원군 손자 이준용 등이 도학도와 내통하여 고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으나 무위로 끝났다.

갑오경장 초기에 흥선대원군이 일부 개혁세력에 추대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개혁주도 세력과 일본공사 등은 흥선대원군의 실권을 거세 한 채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이 해에 홍범 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종묘에 서고 하였다.

 

청일전쟁 후, 3국 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 로 정책을 취했으며, 일본공사는 친일정객과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했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고,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 조처까지 취했으며, 얼마 후, 민 씨는 복위의 조서를 내려 비전을 태원 전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로 추택 되고 홍릉에 국장되었다.

1884년 러시아와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청, 일 양국군의 충돌 등에 자극으로 러시아와 비밀리 밀약을 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세력을 물리치고자,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했다.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여 10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 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했다.

그 후, 독립협회 회원 중심으로 만민공동체가 자유 민권운동을 강열하게 전개했으나, 보부상과 군대의 힘으로 이를 진압을 했다.

고종은 둘째 아들은 의친왕, 셋째 아들은 영친왕으로 봉하고, 1901년 순빈 엄 씨를 계비로 맞이했다.

일본의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으며,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고종은 반대를 했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정을 전반적인 간여와 외교권을 박탈했었다.

 

일제에 아부한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으로 7월 20일 퇴위를 했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고 고종은 실권이 없는 태황제가 되었으며,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을 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사망을 했다.

능은 홍릉에 있으며 저서는 주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