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페레스 트로이카(Perestroika)란 무엇인가?
1. 서언
1987년 11월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저서로서, 미국의 Harper & Row 출판사 요청에서 집필된 것으로, 소련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과정에 생긴 긴급과제였으며, 이 시기의 소련 상황은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가득 차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과거 소련의 그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솔질한 자기비판,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적 우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부조리, 비리를 냉엄하게 시인하고 고발하면서, “악의 제국”이란 소련관을 불식시키려고 세계 평화의 보랏빛 이상을 설명하고 있다.
소련은 혁명 후 철의 장막에 가려진 소련 사호의 변화에 대해 “페레스트로이카”는 공신력을 가진 많은 정보를 주었으며,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느냐 소멸하느냐의 기로에 선 국가의 운명을 설명했다.
2. 페레스 트로이카의 배경
페레스 트로이카는 소련 사회주의 사회의 변화와 발전과정의 시기에 변혁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대혁명 일어났던 러시아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낡은 국가로서 활력을 잃고 실패로 경제적 하락으로 생산효율, 제품의 품질, 과학기술, 하이데크놀로지의 개발과 첨단 기술의 이용 등이 갭이 커지고 있었다.
특히, 중공업 분야에서 총생산 고를 올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나 국가의 부의 상당 부분이 낭비되고 고도의 과학기술의 수준이 미달되었다..
총생산 고 제일주의는 낭비적인 프로젝트와 노동력과 원료 및 자본을 최대한 많이 사용해 본 노동자나 기업이 최고라고 여겨졌다.
기업의 경영자들은 어떻게 하면 국가의 자산을 중식 시킬까는 생각지 않고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원자재와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제품에 넣어 보다 비싼 값을 제품을 팔 수 있을까를 생각함으로써, 총생산 고를 중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품은 아주 부족했다.
결국, 광범한 경제발전의 둔화는 경제의 파탄과 정체화로 이어져서 경제의 재정 상태의 악화 더욱더 급박해지면서, 성장률의 저하와 경제적 침체는 소련 사회의 다른 방면에도 영향을 미치게 했다.
그러므로 경제 성장률은 급속히 하락하고 품질 검사기능이 적절히 작용하지 못했으며 과학기술의 진보를 수용하려는 의욕이 없어 생활 수준의 향상이 지연되어 식료, 주택, 소비물자, 서비스 등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브레이크 현상이 나타나서, 제기된 문제를 건설적으로 검토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시도를 맹렬한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부의 발표, 신문의 기사, 책의 내용 등 모든 것에 대한 일단 의심하여 대중의 모럴도 쇠퇴하면서, 생소했던 전형적인 대중문화가 침투하여 저속하고 저급한 취미 향락 풍조를 낳고 이데올로기의 황폐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속도가 해결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면서 소비에트 전체 사회는 수습이 불가능 가게 되었다.
소련 국가에서 과학, 경제, 문화 등의 발전을 계속하여도 부정적 현상은, 마치 핸들을 쥔 사람은 자동차가 목적지로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제로는 코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페레스 트로이카”의 배경과 이념은 단순히 실용적 관심이나 고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고민해 온 양심의 산물이며 혁명에 의해 계승한 이상을 수호하려는 불굴 정신의 소산이다.
3. 소련의 경제적 문제
1) 소련의 계획경제는 경직된 지령적인 관료 경제로 인해 경제를 침체시키고 하강 선으로 내려앉는 경제의 낙후성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한 전체주의로서 반 인간적인 정치 지도자의 전제를 보여 준 것이다.
2) 노동을 신성시하는 소련의 사회주의가 노동을 기피하고 노동에 대한 사회 정의를 왜곡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자본주의 하의 빈부의 격차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처럼 사회주의 과다 평등주의의 병리도 이에 못지않은다는 사회적 병리라는 것이다.
3) 사회주의 경제하에서도 인간에게 보너스, 임금 격차, 원가계산, 독립채산제, 경쟁 체제 등이 필요한데, 이런 인센티브가 없는 사회는 활력을 상실하고 경영합리화의 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4) 기업의 자주성을 강화한다는 시책은 지령경제 하에 잠자던 기업은 독립채산제에 의한 자기 책임을 지우는 기업 책임제이었다.
4. 소련의 정치문제
1987년 지금까지 공산권의 선거는 1인 후보자만이 투표용지에 인쇄되어 있고 선거관리 위원 앞에서 투표함에 넣는 100% 보장되는 신임 투표였다.
선거권자가 후보자를 반대하려는 사람만이 투표장 구석 박스에서 인쇄된 이름을 지우고 투표함에 넣으므로 반대표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르바초프는 민주화의 구호를 내세우며 복수 후보제와 비밀 투표제를 실시할 것을 제청했다.
이와 같이 스타린 비판의 재개와 소련 역사의 제검토 작업이 과감하게 진행되었으나, 해빙과 개방 경향이 1당 독재, 사사의 11 원적 체제 등의 근본까지 미칠지는 의문이 되었다.
정치적인 당 관료가 관료주의적인 지령, 명령에 의해 경영의 합리화를 누적된 병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제1차 청산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5. 국가의 기업 법 실시
사회주의 경제로서 완전 고용과 물가안정의 기본 틀을 허물고서라도 가후의 악순환에 빠진 소련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능력에 따라 임금 격차를 두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국가 예산에서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방대한 부실기업, 산업체들 적자기업들이 도산도 할 수 있고 해고도 할 수 있는 경영합리화의 법적 근거를 198년 1월 1일부터 국가 기업법을 실시했다.
구가 기업법의 내용은 노동 집단이 기업의 전권적 자주적인 주체가 되어 온갖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각 기업의 이윤은 자주적으로 운영하고, 임금 자금, 사회발전 자금, 과학기술 발전 자금을 형성한다.
기업경영은 중앙의 지도와 노동 집단의 자주 관리의 요소를 결합하며 모든 관리 요원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6. 결 론
페레스트로이카는 혁명으로서, 소련 사회의 사회, 경제, 문화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가속화시켰으며,, 질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하는 근본적 변혁시키는 과업이었다.
10월 혁명은 러시아의 일천 년 역사의 전환점으로서 인류 발전에 유례없는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페레스트로이카는 10월 혁명의 70주년의 해에 새로운 혁명과 같은 것으로서 쿠데타나 궁정 혁명과 구별되는 위로부터의 혁명인 것이다.